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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창밖에는

계절의 뒤안길에서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은 한 철의 느낌을 바꿔가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어디론가 자꾸 흘러가고 싶은 구름이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마음이 이끄는 데로 나가 길을 걷는다.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이를 핑계로 내 삶에 쉼표를 찍는 기쁨에 젖어 본다. 열정이라고 말한 것들을 잠시 뒤로 미뤄 놓고 물끄러미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며 완상(玩賞)하는 여유로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 인간의 중년기를 자연에 대비하면 가을이라는 시기다. 봄이 파릇파릇하게 소녀처럼 새싹을 틔우고 잎을 내미는 사춘기라고 한다면, 여름은 왕성한 열정과 성장의 동력을 가동시키는 청년기다. 그 푸름이 지치고 나면 제 잎 속에 과육을 감추어 키우고 뜨거운 태양 아래 제 열매를 익히는 결실로 젖어드는 가을이다. 당연히 가을은 완숙(完熟)미의 절정이다. 그 사이로 원숙(圓熟)한 중년 여인이 세월을 느끼며 걸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멋진 가을 풍경인가?

지금 나는 도시의 아파트를 물속에 그려내는 도심 속의 호숫가를 걷고 있다. 가을볕을 듬뿍 받으며 갈대가 호위병처럼 서서 흔드는 들길을 가을여인이 돼 걷고 있다. 한편에는 잘 익은 벼들이 누렇게 자신의 치장을 드러내며 결실의 풍성함으로 일렁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뭇 들꽃들이 합창으로 어울려 가을 향취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노라면 잘 정돈된 아파트가 호수를 내려다보며 호수 속에 제 얼굴을 빠뜨리고 도심 속에서도 전원을 꿈꾸는 듯 정겹게 어울려 있다. 이 길은 평소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이다. 이 길 위에서 사색을 하고, 이 길을 따라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오랜 시간의 친숙한 쉼터다. 몇 덩어리 양떼구름이 파란 하늘을 시샘하듯 제 모습을 띄우고 하늘 가장자리로 서서히 흐르고 있다. 사람이 사는 인생의 호수에도 저렇게 구름 몇 점 정도는 있어야 오히려 살아가는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호수 가운데 구름 꽃이 피고 있다. 자기의 얼굴을 호수에 비춰 보는 하늘도 아파트도 갈대도 코스모스도 모두 호수 속에 잠겨 있다. 내 마음도 가을과 함께 잠겨 있다. 호수를 돌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이 풀들도 이렇게 제 나름대로의 풀꽃을 피우듯,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 내가 그리운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아프고 진솔한 시간 속에 삶의 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싶다. 그 여름날 태양빛을 맘껏 안았던 벼들도 누런 색깔로 제 자신을 겸허하게 드러내며 결실의 계절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행여 끓는 주전자 물의 온도를 적당히 식혀 도자기 찻잔에 부었을 때 차 맛을 제대로 내는 초점의 시기를 좀 놓치면 어떠랴. 어우러짐도 달라짐도 즐거이 받아들이는 넉넉한 여유가 좀 부족하면 어떠랴. 자신에 대한 실수를 용납하고 안하고의 차원이 아닌 자신에 대한 깊은 배려의 시기가 중년의 시기요 인생의 가을이다.

내 인생의 창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 많은 한국인은 세상사에 관심도 많다. 인생의 중년기는 노년기를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 어느 작가의 말대로 “젊은 시절에는 체중 몇 킬로그램 줄이거나 코를 조금만 높여도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믿지만, 중년기의 시련을 거치다 보면 자만심을 버리게 되며 다리의 각선미가 완벽하지 않아도 건강하게 걸을 수 있다는데 감사 할 줄 알며 눈가에 주름살이 지더라도 웃을 수 있는 일에 행복임을 안다”고 말한 것이 수긍이 된다. 나무들도 그 여름 잎사귀 속에서 자신이 아끼고 키워 오던 과육의 맛을 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많은 내공을 쌓는다. 벌과 나비, 태양과 대지, 물과 바람의 풍화 과정 속에 유정한 사랑과 노력이 있다. 그렇게 성숙하며 그렇게 자기를 채워가는 것, 시간의 흐름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것 또한 살아가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올 가을은 저 풀꽃처럼, 제 모습으로 핀 코스모스와 갈대의 하얀 손 흔들림처럼 인생의 창밖에서 나를 찬찬히 볼 수 있는 여유로운 가을빛이 되고 싶다.

유선자 <수필가·칼럼위원>

유선자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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