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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와 통일의 여정에서 만나는 권오헌의 실천적 삶출향인 인터뷰<19>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11.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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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옛 은사가 권한 ‘마르크스자본론’ 읽고 인생의 전환점이 돼
양심수문제와 통일문제에 한 평생을 보내는 양심수의 대부
글쓰기, 농촌운동을 할 때부터 일기 쓰듯 조금씩 기록 시작
20대부터 민족·민주·통일운동에 투신, 이론·실천 양수겸장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82) 명예회장은 지난 30여년 가까이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활동을 펼쳐온 장본인이다. 본인 스스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권 명예회장은 양심수를 뒷바라지하며 팔순을 넘겼다.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직을 내려놓고 명예회장으로 한 발짝 물러났지만 여전히 현장 곳곳을 누비다 지난해 여름 덜컥 폐암 진단을 받았다. 폐암4기 판정까지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건강한 모습에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 회장을 서울 수유리 북한산자락의 자택에서 만났다. 권 회장은 지하철 수유리역에서 마을버스로 5분 정도의 거리인 북한산 인수봉자락의 홍익파크빌라 2층에 살고 있었다. 기자를 마을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온 권 회장을 따라 찾은 자택에는 현관문을 들어서자 온 벽에 책과 자료들로 가득했다.

■ 농민운동에서 시작한 사회운동의 참여
권오헌 회장은 홍성군 홍북읍 용산리 용두마을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굶주리고 착취 받는 것이 일제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해방이 되고서 알았다고 한다. 1951년 홍북초등학교를 14회로 졸업하고 3년간 4H 활동을 통해 청소년사회운동을 했다. 농민운동을 통해 문맹퇴치운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던 권 회장은 3년간 군대생활을 하고, 다시 3년간 농촌사회운동에 매진한 뒤 1964년 노동판에 뛰어들었다가 한일회담 반대운동부터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참여, 1968년 통일사회당 입당,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다. 출옥 후 양심수와 양심수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정년 없는 양심수의 대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후원회 결성을 주도하며 50여 년 동안 우리나라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왔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의 길은 박정희 독재체제의 전반기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시대요, 후반기는 유신치하의 긴급조치 시대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권 회장은 북에서 내려온 이름 모를 피난민부터 통일사회당 입당 계기를 마련해준 박금서 성신여대 교수, 통일사회당 정당 작업을 하던 김철(김한길 전 국회의원의 부친), 당대의 선각자들인 함석헌 선생,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와 김승훈 신부, 양호민(조선일보·사상계), 천관우(동아일보), 박현채(경제평론가·조선대), 구중서(가톨릭신문·수원대 교수), 염무웅(창작과 비평·영남대 교수), 임헌영(경향신문·현 민족문제연구소장), 3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서 동거한 남민전 책임자 이재문 선생까지 숱한 인연을 밝히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스물여덟 살 때 서울에서 만나 세권짜리 ‘마르크스 자본론’을 건네준 옛 홍북국민학교 담임이었던 정인무 전 한영고 교감이 “이건 자네가 봐야 할 것 같다면서 책을 주시는데 사회·경제·문화가 다 나오더라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노트에 ‘가치’같이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읽었어”라며 권 회장은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불리지만 그 당시 국민학교 시절 내가 꽤 공부를 잘했던 기억이여. 졸업 때 내가 전교 1등을 해서 도지사상을 받았어. 장학금을 받아서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로 돼 있었는데 전쟁이 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 올 여름에 홍북초등학교를 방문해 당시 성적표를 발급받았더니 내 기억이 맞더구먼. 당시 남성희 선생님이라고 계셨는데 우리 동네에 사셨고. 나는 당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계모님 밑에서 컸는데 참 설움을 많이 당했지. 집에서는 거의 잠을 안자고 동네 사랑방 등에서 늘 새우잠을 자곤 했는데, 동네에 큰 무덤이 있었는데 아무도 없을 때에는 그 앞에서 엉엉 울던 게 아직도 생각나지. 집안 형편 때문에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도 못하고 국민학교만 마쳐야 했던 것도 어린 마음에 상처였지. 대신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책을 보면서 위안을 삼곤 했는데, 당시만 해도 책이 엄청 귀할 때라 책을 구하기 위해 안 다녀본 데가 없을 정도였지. 내가 맨 처음 농촌운동에 뛰어든 것도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 소설의 영향이 컸어.”

■ 민주화와 통일의 여정에서 만나는 삶
인터뷰를 위해 찾은 기자로서는 개인적으로 홍북초등학교 대선배인 권 회장이 팔순을 맞은 지난해 두 번째 문집을 출판했다며 첫 번째 문집과 함께 ‘후배에게 선물한다’며 책 보따리를 내밀었다. 병고와 싸우면서도 지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15년에 걸쳐 썼던 글들을 모으고 정리한 문집 ‘민주화와 통일의 여정에서 만나는 권오헌의 실천적 삶’이라는 총 3권의 책과 지난 2006년 고희를 맞아 1991년부터 2002년까지 발표한 글을 추려서 ‘인권을 다지며 자주통일의 길로-권오헌 선생님 고희 기념 글 모음집’이란 첫 번째 문집 이었다.

책을 받아들면서 ‘글은 언제부터 쓰셨느냐?’는 질문에 “농촌운동을 할 때부터 일기 쓰듯이 조금씩 기록하기 시작했지.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농촌운동을 그만두고 노동현장에서 일할 때였어. 1964년 충북 단양에 있는 시멘트공장에서 장비기사로 노동일을 하면서도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썼지. 마을 하나를 바꾸는 것으로는 민주화 운동을 못할 것 같아 결국 고향을 떠났는데, 중간에 포기했다는 죄책감에 오랫동안 고통스러웠어.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매일 책 40페이지를 읽고 글 40페이지를 쓰기 시작했지. 일종의 자기 학대처럼 글을 쓴 거지. 현장 일이 고된데다가 잠도 못 자니 그때부터 몸이 마르더군. 대신 글 쓰는 게 습관이 됐어. 지금도 매일 무엇인가를 쓰지 않으면 하루를 제대로 산 것 같지 않고 허전해. 양심수후원회 소식지가 200호를 넘겼는데 거기에 보면 매일의 기록이 나와 있지. 상당부분이 내가 기록한 것들인데, 대단한 글은 아니지만 모아놓으면 곧 우리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역사지.”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문집 서평에서 “20대 초반시절부터 민족·민주·통일운동에 투신해 온 권오헌은 이론과 실천의 양수겸장이다. 그는 우리 시대에 가장 뜨겁고 성실하게 현장에서 앞장서 투쟁하며, 그 투쟁을 이론화시켜 온 터라 그 논리는 정연하며, 쟁점은 또렷하고 해결책은 분명했다”고 평가했다.

권 회장은 “내가 철이 들고 사회적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이 해방 다음날이었던 것 같아. 국민학교 1학년 때였는데, 작은 아버지가 ‘일본이 망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장롱 속에 깊숙이 놔뒀던 지금으로 치면 한글교본을 주면서 ‘오늘부터 이 공부를 해라. 왜놈 글은 이제 안 해도 된다’고 말씀하셔. 바로 그날 면사무소와 학교를 가보니까 학교 신사가 불타고 일본 교장선생이 아래만 가리고 발가벗긴 채 ‘나니모 나이, 나니모 나이(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봤지. 그때 청년들이 왜놈들로부터 그 압박과 설움을 받았는데 ‘이제 우리 독립을 했다. 우리는 독립국가다’라고 외치던 것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이 쟁쟁해. 그것이 내가 사회적 존재감을 갖게 된 거지. 우리 마을에서 일어났던 해방공간의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청년운동이기도 했지만 좌익운동이기도 했고, 지금으로 보면 자주통일운동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동네사람 70여명이 한꺼번에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심각한 우리 이념대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됐지. 그렇게 시작된 사회적 존재감이 내가 어머니와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사회적으로는 아주 격변시대였고, 전쟁을 겪었지. 어려운 시대를 지내면서, 그럴수록 왜 그렇게 책을 보고 싶어 했는지. 사회적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이것이 움터서 나중에 이런 사회활동 하는 토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야.”

홍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농촌의 4H 활동을 통해서 청소년 사회운동을 했고, 3년 동안 군대생활을 했으며, 제대 후 3년간 또 농촌사회운동을 했다. 이때부터 정치적 의식을 가진 사회운동가 권오현 회장은 “양심수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 한 내가 하던 일을 멈출 수 없다”면서 양심수 문제와 통일문제에 관련한 일을 하며 이렇게 한 평생을 보내고 있다.

권오헌의 저서‘민주화와 통일의 여정에서 만나는 권오헌의 실천적 삶’.

■ 권오헌 명예회장이 걸어온 길
△1937년 홍성군 홍북면 용산리 용두마을 출생 △홍북국민(초등)학교 제14회 졸업 △1956 농촌 청소년운동 홍성군연합회 결성 △1961 농촌사회운동(농사개량, 신용조합, 야학 등) △1964 군사정권 한일회담 반대 운동 △1968 통일사회당 입당, 통일사회당 문화국장, 서울시 제1지구당 위원장 △1972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한국지부 결성 참여 △1974 유신반대,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조직사업 △1979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 사건으로 체포, 3년 4개월 복역 △1983 남민전 관련자 석방운동과 후원활동(장기수가족운동협의회) △1991 양심수후원회 회장, 민가협 공동의장 △1999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 △2000 제11회 사월혁명상 수상 △2001 6·15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공동대표 △2002 한총련 합법적 활동보장을 위한 범사회인 대책위원회 상임공동대표, 미군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 상임고문 △2003 송두율 교수 석방과 사상 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 상임공동대표 △2004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 과거사법 개정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5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6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 △2007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2008 무건리훈련장 확장저지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9 범민련 탄압대응 시민사회공동대책위 상임공동대표 △2017 양심수석방추진위 공동추진위원장 △2007~현재 6·15 한마음통일 산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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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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