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 김복한 문집 번역·출판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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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김복한 문집 번역·출판 된다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9.04.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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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환 군수, 문집과 행적 모아 번역·출판 약속

파리장서운동, 사람답게 사는 세상 염원한 사건
지산 김복한의 시 문집인 지산집.

지난 19일 서부면 이호리 추양사에서 열린 지산 김복한 선생 추모제향과 파리장서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김석환 군수, 김헌수 군의회 의장, 이종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지산 김복한 선생의 증손녀, 독립유공자 최명용 선생의 후손인 최철수 선생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제향을 마치고 인근의 인지재(仁智齋)로 이동한 추모객들은 우리 고장의 유림들이 나라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파리장서운동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석환 군수는 “지산 김복한 선생이 주도한 파리장서운동은 모든 사람들이 사람  대접을 받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염원한 우리 고장 선비 선현들의 숭고한 홍주정신을 만천하에 알린 매우 뜻 깊은 사건”이라며 “지산 선생의 이러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고장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이어진 추모객들과의 대화에서 김 군수에게 ‘독립선현들을 기리는 일에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자 이에 대한 답변에서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지산 선생의 문집을 번역 출판하고, 관련된 분들의 행적을 모아 출판하는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라고 관련 실과에 지시했다”고 소개하고 “늦게나마 선생과 관련된 분들의 정신과 행적을 기리게 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남은 임기동안 이러한 일들을 마무리하는데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광윤 문화관광과장도 “군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았고, 지산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은 이미 착수한 상태”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김헌수 군의회 의장도 “독립선열들의 정신을 찾아 계양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자세”라고 말했다.

파리장서운동은 1896년 제1차 홍주의병전쟁, 1906년 제2차 홍주의병전쟁을 주도했던 홍주유림들이 1912년 독립의군부, 1915년 대한광복회,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이어 전개한 독립항쟁이다. 이 모든 항쟁에 홍주유림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계돼 있었고, 파리장서에는 총137명이 서명했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17명이 서명했다. 다른 지방과 달리 행동강령으로 각급 향교, 학교, 관공서, 대중 집회 장소에 보내는 격문(檄文)이 별도로 임한주 독립운동가에 의해 작성됐다. 홍주유림의 독립항쟁정신은 이후 백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독립전쟁(1920), 인도공의소운동(1923), 무공회운동(1925), 유교부식회운동(1927)과 신간회운동(1927),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1932)로 연결되는 우리고장의 자랑 스런 독립항쟁이다.

1895년 일제강점기 홍주성에서 거병해 구한말 호서지방 독립운동의 효시가 됐던 지산 김복한 의병장은 문과를 통해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홍문관, 춘추관을 거쳐 우부승지까지 올랐다. 지산 김복한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울분을 삭이지 못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홍주(홍성)로 낙향했다. 낙향한 이듬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전국이 소용돌이치자 같은 해 12월 1일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 창의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당초 동참키로 한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패배하고, 10년 유배형을 받는 등 고통을 당했다. 이후 1906년 홍주의병 가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자신이 기초한 ‘파리장서’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지산 김복한은 세 번째 옥살이를 하게 됐고 이때 지병을 얻어 투병하다가 1924년 3월 65세를 일기로 서거할 때까지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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