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람답게 짧고 굵게 살다간 홍성의 혁명가 ‘이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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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사람답게 짧고 굵게 살다간 홍성의 혁명가 ‘이강세’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9.06.2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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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 보훈의 달
고 이강세가 1928년경 남산공원의 일제신사를 부순혐의로 지명수배 되면서 일본으로 도피한 계기가 됐다.

6·25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체를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6·25한국전쟁 당시 경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의 유해 중 DNA가 일치해 자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이 6·25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아버지의 정체를 찾지 못했던 아버지 고 이강세와 아들 이종민이다. 외아들인 이종민도 70세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버지의 영혼과 뼛조각을  품에 안고서 지나간 세월에 대한 흔적들의 파노라마를 기억으로 더듬을 뿐이다.

이강세는 1908년 홍동면 금당리 황새울에서 아버지 이흥로와 어머니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이강세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홍씨가 홍성읍 월산리 장씨 집안으로 개가를 하게 되자 백부인 이장로 밑에서 성장했다. 이장로는 유학과 한문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며, 아들인 이관세(이강세의 사촌 동생)는 공주고보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해 공주고보의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후 홍동면자치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다.이러한 환경에서 함께 자란 이강세는 자연스럽게 항일운동과 민족정신을 지니게 됐고, 의협심과 의지가 강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 였다.

이런 이강세는 1922년 홍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홍성읍으로 나와 홍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해 1927년 17회(김영환, 채수복, 한보국 등이 동창)로 졸업한다. 졸업 이후 이강세는 1928년 경 일본으로 도피한다. 이유는 당시 홍성읍 남산공원에 있던 일제신사를 부수고 오줌과 침을 뱉는 등 훼손하는 것을 당시 일본인 읍장에게 들킨 이후 지명수배(홍성읍 월산리 장아무개 씨 증언)됐기 때문이다. 남산공원에 있던 일본신사는 소위 일본천황을 모신 신전으로 일본에 있던 신전과 함께 신격화됐던 장소였다. 일본으로 피신한 이후 농업노동자로 일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사상범으로 몰려 투옥돼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강세가 중국이 아닌 일본으로 피신했던 이유는 신문물을 배우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국 후에는 홍성읍 옥암리에 터를 잡고 3년여 동안 일본으로 피신했을 때 배운 양잠기술, 각종과수나무분양 등을 농민들에게 가르치며 가난에 허덕이던 농촌을 살리기 위해 앞장섰다. 이강세는 또 ‘언젠가 새 나라를 세우기위해선 농민들도 배워야한다’며 출생지인 홍동면 대영리에 움막을 짓고 농업지식과 유교사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향을 지켜가면서 독립잔존의식을 키워가던 이강세는 절친 한보국(인공치하 홍성군인민위원장) 최명용, 김영환 등과 교류하며 일제의 폭정 속에서도 농사를 지어가며 독립사상을 키워나갔다. 8·15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와 함께 일본인 철수 후 1개월 동안 혼란했던 홍성군의 치안을 담당하며 친일파들을 응징하기도 했다.  1948년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한때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일먼저 창설한 반공단체로 30여만 명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게 됐고 반공을 빌미로 힘을 갖게 되자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앞 다퉈 가입하길 원했던 단체다. 이때 이강세는 국민보도연맹의 선전부장으로 실권을 갖고 연맹원의 자격을 심사, 선별 해 가입시켰다. 이 증언은 이강세의 부인이며 이종민의 어머니인 이묘희 씨가 1988년 미국에서 임종하기 전 아들에게 전한 말이다.

■ 처음 창설한 홍성군농민조합의 수장 이강세

1934년경의 고 이강세.

이강세는 보도연맹원의 부자격자로 첫째, 일제 36년간 앞장서 친일을 한 자. 둘째, 노부모를 모셔야 되는 자나 집안의 장손 등은 피했다. 보도연맹의 험난한 앞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강세는 두 명의 동복형제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활동했던 바로 밑의 동생(당시 홍성국민학교 교사) 장아무개 씨는 9·28서울수복 이후 홍성경찰서 유치장에서 옥사했다. 이강세는 형제 중에 어머니를 모실 자식이 하나는 있어야 된다며 끌어 들이지 않았던 막내 동생 장아무개 씨는 노모가 84세까지 사는 동안 두 형님들 몫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고 공화당정부 19년 동안 홍성축협조합장을 지냈다.

당시 이강세의 홍성읍 옥암리 집에는 한동안 하루저녁에 10여 명 씩 보도연맹 가입희망자들이 모여들어 자격심사를 받곤 했다. 그때 해방 이후 홍동면인민위원장을 지낸 이관세(이강세의 사촌 동생)는 사촌형수인 이종민의 어머니를 찾아와 “형님이 나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관세는 이씨 가문의 장손이었다. 이강세를 졸라 보도연맹에 가입한 이관세는 김일성의 주력부대가 천안까지 내려오자 1950년 7월 11일 경찰과 특무대가 후퇴하면서 저지른 국민보도연맹원 학살현장인 용봉산골짜기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1945년 해방직후 전국조직으로 창설된 홍성군농민조합은 이강세를 수장으로 추대하고 농업이 살아야 새 나라를 세운다는 일념으로 농사일을 더 열심히 했다. 한편 일제가 남기고간 잔재를 청산하는데 첨병역할을 했는데, 이때 당시 이정기 홍성군수(전 총독부 고등계 형사)와 친일파 공직자 몇 명이 응징을 당했다고 한다.

농민조합원은 11개 읍·면에서 약30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상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농민들이었으며, 일제시대 때부터 이들은 이강세와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순수한 농사꾼들이었다. 홍성군농민조합은 1946년 10월 항쟁을 주도, 홍성경찰서, 홍성군청, 구항파출소를 일시 점거하는 등 미군정에 극렬히 항거하다 사살되거나 체포됐다. 지하로 숨거나 다시 농민으로 돌아간 일부 조합원들은 1948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희생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일본총독에 충성했던 친일분자들을 경찰 등 고위직에 복귀시켰다. 정권유지차원이었다. 그들은 해방 직후 농민조합원들에게 당한 봉변을 철저히 되 갑기 시작했다. 이때 지하에 숨어있던 100여명의 농민조합원들이 검거됐으나 수장인 이강세는 어디로 숨었는지 오리무중이었다. 경찰은 그를 체포하기위해 농민조합원은 물론 이강세의 어머니 홍씨, 부인인 이묘희 씨 등을 동원해 찾아내기에 혈안이 됐다. 형사들은 먼저 홍성읍 옥암리 이강세의 집을 밤낮없이 지키며 부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처자식을 보러 언제든 집을 찾을 거라 예상하고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강세는 감쪽같이 형사들의 눈을 피해 가끔 집을 다녀가고는 했다고 한다. 이강세를 변장의 귀재, 홍성의 홍길동이라 불려 졌던 때가 이때였다.

이강세가 옥암리 집을 다녀간 것을 알게 된 형사들은 그때마다 신고를 안했다며 부인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8개월쯤 후에 일어났다. 이강세의 부인이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오면 신고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형사들은 부인의 불러 오른 배에 총부리를 겨누는 등 모진 가혹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그때마다 부인은 쓰러져 혼절하면서도 뱃속의 아기만은 지켜달라고 빌었다. 이강세의 자식사랑이 하늘을 움직였던지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이강세는 자기의 목숨과 대를 이을 자식을 맞바꾸게 된 것이다.

■ 이강세, 70년 만에 아들 품에서 영면하다
이후 이강세는 1949년 초 홍성경찰서에 자수한다. 자수의 동기는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보령 원산도 근방에서 고기 잡는 어부로 변장, 광천 옹암포 인근으로 접근하며 활동을 하던 이강세는 자수 할 때 까지 2년 반 동안 모두 네 번을 집에 들러 어머니와 처자식을 만나고 간다. 집을 다녀갈 때마다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 40이 다돼 얻은 아들과 처자식의 고생하는 모습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검거된 농민조합원들의 자수권고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국회에 친일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이강세는 자수해 기회가 주어진다면 참여해서 친일의 잔재를 합법적으로 털어 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됐을 것이다.

이강세가 보도연맹에 가입하면서 구금돼 있던 홍성경찰서 상무관 벽에 연필로 써내려간 시조 한수에 당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설한풍 눈보라에 하도만 시달려서.
 잎 다진 무궁화 줄기마저 꺾이었다.
 봄바람 단비 오면 거름부터 주리라.”

이강세는 자수하기 전 어머니 홍씨를 통해 홍성경찰서장에게 자수조건으로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한다. 우선 구금되어있는 농민조합원들을 즉시 석방해 줄 것과 가난에 찌들어 있는 보도연맹원들의 처자식을 살리기 위해 양조장 등을 허가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강세는 자수와 동시에 보도연맹에 가입하면서 지금의 홍성군농업기술센터 인근의 전답을 팔아 양조장 ‘도수원’을 설립 운영한다. 당시만 해도 황금알을 낳는 기업으로 알려진 막걸리 양조장 ‘도수원’은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하기까지 1년 반 동안 흑자로 운영된다. 조를 짜서 밤새워가며 운영되던 양조장 ‘도수원’은 6·25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0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하루아침에 학살당하자 문을 닫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똑 같은 장소에 양조장하나가 생겨났다. ‘도수원’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른 주인으로, 수년 전까지 운영하던 그 양조장은 건물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채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2016년 2월 26일 광천 오서산 담산리에서 6·25한국전쟁 때 학살됐던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추정되는 유골 21구가 발굴됐다. 유족들은 정중히 용봉산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에 안치했다.

홍성군, 홍성군의회, 민변, 4·9평화재단 등의 시민단체와 유족들의 협조로 2019년 5월, 21구 유골의 DNA에서 세 명의 살아있는 자식이 아버지를 찾게 됐다. 21개의 박스 중 10번 박스속의 유골과 이종민의 DNA가 일치함으로써 이강세는 70년 만에 아들을 만나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의 품에서 영면하게 됐다.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홍성군유족회(회장 이종민)는 열다섯 번 째 추모제를 오는 7월 11일 용봉산 추모공원 현지에서 거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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