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첫 주재기자, 한국일보 김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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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첫 주재기자, 한국일보 김양수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9.08.3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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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신문 지령(紙齡) 600호 발행 특집

홍성지역의 언론 600년을 말하다<4>

5·16군사쿠데타 이후 특히 지방에서는 사이비 기자를 색출해 낸 언론정화사업이 끝나면서 한국일보가 처음으로 지방주재기자 채용시험을 실시했다. 1963년 한국일보에서는 일본(日本)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지방주재기자 제도를 본 따 전국 각 지역을 몇 개의 지구로 나누어 지구별로 지방주재기자 시험을 본 것이다. 이때 충남(忠南)에서는 서부지역 중심인 홍성이 주재지로 선정돼 홍성지구(洪城地區) 한국일보주재기자 채용시험이 실시됐다. 당시 홍성출신인 김양수(金亮洙·사진)가 한국일보 지방주재기자 1기생으로 뽑혀 그해 4월 5일 한국일보사에 입사, 본사에서 수습교육을 마치고 홍성지역 최초의 주재기자로 발령됐다.

이때부터 전국이 같았지만 홍성지방 언론은 지방주재기자들이 주도해 나갔다. 한국일보에 이어 각 중앙신문사가 지방주재기자를 뒀다.

1963년 6월, 한국일보보다 2개월 뒤늦게 동아일보가 홍성지방주재기자 채용시험을 현지에서 실시했다. 동아일보 홍성주재기자도 역시 홍성출신인 정상희(鄭祥熙)가 뽑혔다. 동아일보는 한국일보와 달리 본사 수습교육을 치루지 않은 채, 발령과 동시에 홍성에 근무토록 했다. 정상희(鄭祥熙)가 근무한 지 2년째, 정상희는 대전주재기자로 이동됐고, 두 번째 채용된 기자도 홍성고등학교 출신인 이붕원(李鵬遠)이었다. 이렇게 채용되기 시작한 홍성지방주재기자는 각 사별로 총 8명이 됐다. 1963년도에서 1964년도까지 홍성에는 한국일보, 동아일보에 이어 경향신문, 대한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대전일보, 중도일보 등의 지국이 개설됐다. 그 당시 홍성주재기자는 ◇경향신문 이장직(李長直) ◇대한일보 최강묵(崔光黙) ◇대전일보 심재홍(沈載洪) ◇서울신문 임병천(林炳千) ◇동아일보 정상희(鄭祥熙) ◇조선일보 임명섭(林明燮) ◇중도일보 한원태(韓元泰) ◇한국일보 김양수(金亮洙) 등 이었다. 이 중에서 외지출신으로는 경향신문의 이장직(李長直) 한 사람 뿐이었고 나머지 7명이 모두 홍성 출신이었다.

이들 지방주재기자가 취재전담을 나서면서 각 신문에는 6면(面)에 충남판(忠南版)이라는 지방 기사란을 설정해 놓고 지방 독자를 위한 충남(忠南) 지방 기사를 보도해갔다. 지방 독자에게 자기 고장의 기사를 읽게 함으로써 신문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높아진 관심 속에서 신문보급 확장을 꾀한 것이다. 지방 독자가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종전과는 달리 매일 보도되는 기사로 인해 신문과 독자 간 마찰이 빈번해졌다. 당시 홍성주재기자들의 취재 구역은 신문마다 약간 다르긴 했으나 지방신문 2개지(大田日報·中都日報)를 제외한 중앙지에서는 홍성을 중심으로 한 충남서부지역 7개 군 홍성(洪城)·서산(瑞山)·예산(禮山)·보령(保寧)·서천(舒川)·청양(靑陽)·당진(唐津)을 그 구역으로 했다. 이 같은 취재구역은 홍성주재기자가 충남도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맡은 셈으로 그 구역의 독자들은 모두 홍성발(洪城發)로 보도되는 지방기사에 관심을 쏟았다. 일선 행정기관은 물론, 다른 각급 기관·단체에서도 매일 보도되는 기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당국의 아이템기사나 어떤 피알(P·R) 기사일 경우는 별문제였으나 시비가 일어날 비판적 기사가 터져 나올 때는 이해당사자가 직접 지방주민이거나 그 지방 기관·단체였기 때문에 마찰이 없지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신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층에서는 지방주재기자가 없는 편이 오히려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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