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홍주 6군상무사’ 160년 ‘부보상’ 맥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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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홍주 6군상무사’ 160년 ‘부보상’ 맥 잇다
  • 한관우 기자
  • 승인 2009.09.0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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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홍주 6군상무사 활동상 다큐로 제작, 선보여

지난 6월 아산 외암마을 민속촌에서는 원홍주육군상무사의 장시 이동장면 촬영이 있었다. 이날 촬영에는 출연진 및 스탭 등 30명이 동원되어 160년전의 모습을 재현했다.

홍주(지금의 홍성)에는 부보상의 근거지로 ‘원홍주6군상무사(元洪州六郡商務社)’가 있었고, 지금까지 맥을 잇고 있다. 6군 이라함은 홍주, 광천, 결성, 보령, 청양, 대흥을 가리키며 본부는 지금의 광천읍 옹암리에서 남서로 2킬로미터에 위치한 ‘홍도원’이다. 옹암포는 6군상무사의 중심지이며, 4일과 9일에 열리는 장날에는 150여척의 어선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6군상무사는 바다와 육지 양쪽에 걸친 상품을 두루 다루고 있어 물건이 다양했고, 충청도에서 가장 번창했던 상권으로 꼽힌다. 청금록에 의하면 철종 2년 대흥에 사는 임인손이 그해 4월 조령을 받고 처음으로 접장에 선임됐다. 홍주, 결성, 보령, 청양, 대흥 등 5읍에 임방을 개설하고, 소임을 감내할 사람을 정해 장시의 제반업무를 관장했다. 6군상무사로 시작된 것은 1901년 당시 접장인 최덕주가 전래되어 오는 상무사 관련 자료를 수집 역대 임원록을 청금록이라 이름지었다. 후에 강주흠이 수보작업에 착수, 미비 된 기록을 보완하고 영위에 취임, 원홍주6군상무사라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됐다. 상무사는 본소와 임소를 두고 있는데 본소는 6군상무사의 임소를 총괄하고, 임소는 장시가 열리는 지역마다 설치돼 시장을 운영해 왔다. 남쪽에는 ‘저산팔구’가 위치하고, 동북부에는 ‘예덕산상무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원홍주6군상무사(접장 한상인)는 1851년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홍주, 광천, 보령, 청양, 대흥, 결성의 6개 군 지역에 걸친 유서 깊은 부보상 조직이다. 조직이 결성된 이래 지금까지 160년 동안 전래돼 오는 풍습 그대로 부보상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그 맥을 이어 지키고 있는 부보상 단체이다. 또한 부보상 단체인 육군상무사의 문적(文籍)들은 1992년 7월 중요 민속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됐다.


충남지역의 부보상 문화는 기념비적인 유산으로 꼽힌다. 물길과 육로가 통하는 사통팔달의 요충지이자 풍부한 물자가 생산되고 유통되면서 각 지역마다 장시(場市)가 발달했다. 봇짐을 메고 각 장시를 오가며 물자를 공급하던 부보상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무대였다. 충남의 부보상은 지금도 그 전통과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부보상을 다스리던 기관인 상무사(商務社)가 현존하는 곳은 전국적으로도 5~6곳에 불과한 실정이다.


충남지역에는 내포부보상의 근거지인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와 홍주ㆍ광천ㆍ보령ㆍ 청양 ㆍ대흥ㆍ 결성 등 6개 군 지역에 걸쳐 있던 ‘원홍주6군상무사(元洪州六郡商務社)’가 대표적이며, 모시가 많이 생산되던 부여ㆍ 홍산ㆍ남포ㆍ비인ㆍ한산ㆍ서천ㆍ임천ㆍ정산 등 저산8구의 부보상 조직인 ‘저산8구상무사(苧産八區商務社)’가 있다. 각 상무사의 유품은 지금도 보존돼 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이들 상무사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등 상인공동체로의 맥을 면면이 이어가고 있다.

 

부보상 문화,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 지닌다


군청 제1회의실에서 시사회를 가진 원홍주육군상무사의 아산 외암마을 로케현장 장면. 연인원 300여 명이 동원되어 제작 된 원홍주육군상무사는 DVD로 배포 될 예정.

평야가 많고 바다와 쉽게 접할 수 있는 내포(內浦)지역의 부보상 문화는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일제 감정기를 거치면서 거의 모든 부보상들이 사라졌지만 내포의 중심지인 홍주의 6군상무사와 예산의 예덕상무사는 150~160여 년간 접장(接長, 부보상을 총괄하는 직책)을 배출하고 있다. 고려 말~조선 초에 조직된 것으로 알려진 이들 부보상 조직은 장을 중심으로 수백 년간 상품의 중개를 맡아오며 지역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최근 내포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내포 부보상촌’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이곳에는 부보상 체험촌, 저잣거리, 객사, 부보상 문화거리와 박물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홍성과 보령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산기슭 일대의 옛 홍도원은 1932년 상무사의 접장인 김재고의 홍도원기금중건기에 의하면 홍도원은 원래 초가 4동에 18칸으로 1930년 봄 공사를 마치고 기문을 쓴 것으로 돼 있는데, 4동의 초가는 주막, 치료사, 관리사가 있던 곳이다. 주막은 광천과 대천을 오가던 상무사들이 이곳에 들러 술을 마시고 갈증을 풀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상품의 시세를 알아보던 곳이다. 이에 대한 개발과 복원도 서두를 일이다.

 

충남의 부보상은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그 전통과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충남지역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봉건사회와 근현대사의 경제주체였던 부보상들의 역사는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충청정신을 대변하는 한 축으로 재정립하고 그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물가가 오르고,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부보상 문화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일은 역사ㆍ교육ㆍ문화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지난 3일 홍성군청에서 시사회를 연 ‘원홍주6군상무사, 홍성의 새로운 역사를 쓰다’는 이런 이유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다큐를 제작한 이종민 홍성닷컴 대표는 “전통사회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 교환경제를 매개했던 전문상인인 부보상의 행실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통문화 속에서 백성의 생활을 지탱했기에 민족의 사랑과 보호를 아낌없이 받아왔고, 민족의 혼을 간직한 독창적 상업유통제도로 확대됐다”고 설명하고 “제작과정에서 오서산 촬영장면에서는 아찔한 장면도 연출됐고, 연인원 300여명이 참여해 부보상의 전통을 재현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지역의 원홍주6군상무사의 활동을 통해 지역유통경제의 역사를 다시 쓰고 나아가 일제가 왜곡한 부보상의 명칭을 바로잡고, 부보상의 뿌리를 재조명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성계가 하사한 전통행상의 대명사 ‘부보상’


‘부보상’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명칭이고, ‘보부상’은 1925년 조선총독부가 부보상을 변조한 명칭이다. 일제 식민통치권력에 의해 명칭까지 변칭된 것이다. 부모(父母)를 모부(母父)로 바꿀 수 없는 이치다. 일제는 전통행상의 대명사인 ‘부보상’을 천민의 대명사인 ‘보부상’으로 바꿨던 것이다. 일제의 부보상 말살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부보상이 보부상으로 둔갑한 것은 1925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데 혈안이 된 조선총독부에서 어용학자를 앞세워 조직한 조선사편수회가 식민사학을 유포하면서 기인됐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확신하는 학자는 경기대 이훈섭 교수다. 이 교수가 부보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1980년 우연히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인의 상업’(1925년 발행)이라는 책에서 소제목은 보부상으로 되어 있고 본문에서는 부보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부터다. 이후 독도를 일본해로 바꾼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완전히 ‘부보상’이 ‘보부상’으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반출판사인 계명사에서 1931년 발행된 ‘조선잡기’에서는 오로지 ‘부보상’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이밖에도 전통 상학(商學)책들을 통해 부보상의 정당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통상아문진정서(1883), 혜상공국감결(1883), 혜상공국절목(1883), 상무사장정(1899) 등에는 ‘부상보상 부보양사 부보휼보 좌우상 부보양상 부보상 좌우사’ 등의 용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홍성읍 대교리 386번지 일원의 전통재래시장 한 복판, 서울누비 뒤편에는 원홍주육군상무사 한상인 접장의 사무실이자 본소가 되는 곳이 있다. 부보상 조상들에 대한 자료를 지키고 또 일제에 의해 변질되어 잘못 알려진 ‘보부상’이 아닌 ‘부보상’으로 지켜내기 위해 한상인 접장이 사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작은 사무실 공간에는 부보상에 관련한 사료들로 가득하다. 원홍주6군상무사와 관련한 부보상촌 개발이나 전시관 등의 건립문제와 함께 이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대한 지원 등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겹겹이 쌓여온 전통과 문화는 현재와 미래를 향한 역사적 산실이기 때문에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반드시 실현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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