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남문지 '문루 적심석' 발견
상태바
홍주성남문지 '문루 적심석' 발견
  • 전상진
  • 승인 2010.02.19 13: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주성 복원 새로운 가능성 제시,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열려

홍주성 남문에 '문루가 있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적심석(초석)이 발견돼 추가 발굴 가능성과 함께 새로운 복원 가능성을 제시해 주목을 끌고 있다.

홍성군은 지난달 4일부터 홍주성 복원을 위해 홍주성 내 남문지 450㎡ 일대(홍성읍 오관리 411-2 외 2필지)에 대한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재) 백제문화재연구원 조사단(단장 서오선)에 용역을 의뢰해 발굴조사를 실시해왔다. 군과 조사단은 지난 1달 여 간의 발굴 성과와 보완점 등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16일 발굴조사 현장에서 차용걸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심정보 한밭대 교양학부 교수, 이남석 공주대 사학과 교수 등 3명의 지도위원을 비롯해 조원창 홍성여고 교사, 한건택 홍성군문화관광해설사, 군 관계자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도위원회를 열어 그동안의 발굴조사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 홍주성남문지 발굴 현장에서 적심석(초석)이 발견됨에 따라 지도위원들과 군 관계자들이 협의를 하고 있다.

이날 3명의 지도위원들은 한결같이 "적심석(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초석) 3칸이 발견됨에 따라 기존의 기록인 '홍예문(문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아치문)이 있었다는 1871년 조양문신건기, 1925년 홍성군지 등의 기록'보다는 문루(궁문이나 성문 등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초루)가 있었다는 1451년 문종실록 등의 조선 시대 기록이 설득력이 있다"며 "홍예문이 있었다면 홍예종석, 홍예벽돌 등 대형석재나 벽돌이 발견돼야 하는데 한 점도 발견되지 않은 것은 홍주성 남문이 홍예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지도위원들은 "1871년 홍주지도에 나와 있는 '남문은 성이 만들어질 당시 방해가 되었다'는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며 "풍수지리상 남문을 개방하면 홍주목 전체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해 문을 폐쇄한 것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문루를 없애고 홍예문이 아닌 임시통로를 만든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조원창 교사나 한건택 해설사도 "지금의 남문 밖 일대는 시가지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논밭이나 하천이 흐르는 허허벌판이었다. 홍주지도에 남문지 일대에 소나무 숲을 조성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풍수지리상 소나무 숲을 조성해 홍주목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했던 것 같다"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신사가 남문지 가까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문루를 허물었다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해 임시문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홍주성남문지 발굴 현장. 군은 안내판을 제거하고 추가발굴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지도위원 중 이남석 교수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홍주성 복원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며 "복원을 하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은 제거하고 꼭 필요한 부분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현재 발견된 것은 적심석 3칸으로 문루 규모로 보아 5칸 적심석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남문지에 있는 홍주성 안내판을 없애고 양쪽 성벽 일부도 해체해 추가 발굴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왜 남문을 폐쇄했는가에 대한 풍수지리상의 문제는 홍성 향토문화 연구자들이 흥미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군 문화관광과 이종욱 과장은 "기록을 따라 '홍예문이 있었다'󰡑고 단정해 홍주성역사관 건립과 함께 남문 홍예문도 복원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문루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니 다소 당혹스럽다"며 "좀 더 여러 기록 등을 검토하고, 꼭 추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면 추가조사에 대한 계획을 빠른 시일 안에 수립해 가장 원형에 가까운 남문복원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