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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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조남민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4.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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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王昭君, 본명은 ‘장’)은 BC 52년, 중국의 형주(지금의 후베이성)에서 태어났다. 전한시대의 제11대 황제인 원제(元帝)가 수천 명의 궁녀를 모집했을 때 왕소군은 16세의 나이로 선발됐다. 수천 명의 궁녀를 일일이 살펴볼 수 없는 황제는 화공들에게 궁녀의 모습을 그려오게 했다. 이때 화공 모연수(毛延壽)는 궁녀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림을 그려줬는데, 가난했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못한 탓에 추한 모습으로 그림에 남게 됐다.

당시는 한나라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전쟁과 화친이 반복되고 있었다. 한나라는 전통적으로 흉노에 대해 채찍과 당근의 양면전략을 구사했는데 어떤 때는 군대를 보내어 전쟁을 하고 어떤 때는 여자를 보내 화친을 맺기도 했다.

흉노의 선우(單于, 흉노족 왕의 호칭)였던 ‘호한야(呼韩邪)’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을 때는 화친의 모드 속에 양국의 정략적 결혼이 추진되고 있었다. 한나라의 공주를 배필로 삼아 부마국(사위의 나라)이 돼 양국의 평화를 모색하겠다는 호한야의 생각은 나름 타당했으나, 여러 현실의 제약 속에 공주대신 궁녀를 취하는 것도 무방하다는 것에 합의했다.

호한야에게 보낼 다섯 명의 궁녀를 뽑는다는 소문이 돌자 왕소군은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후 독수공방을 보낸 수년간의 세월에 대한 원망과 한 원제에 대한 불만의 감정,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호한야의 송별연이 벌어지던 그때, 처음으로 왕소군을 직접 보게 된 원제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단아함을 한눈에 알게 됐다. 후한서(後漢書)의 남흉노전(南匈奴傳)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아리따운 용모와 자태, 유독 빛나네, 양전한 걸음걸이 모두들 찬탄하네.’

궁 안에 이런 미녀가 있었다니… 원제는 왕소군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흉노와의 외교적 관계가 중요했던 터라 이를 되돌릴 수 없었다. 한 원제는 그녀에게 ‘한나라를 빛나는 여인’이 되라며 ‘소군(昭君)’ 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렇게 왕소군을 흉노로 보낸 직후 원제는, 어찌하여 왕소군이 황제의 눈에 띄지 않았는지 조사하게 됐고, 그 이유 또한 알게 됐다. 이에 모연수와 비리에 가담된 화공들이 모두 참형을 당했다. 원제는 왕소군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속에 그녀를 보낸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왕소군은 흉노에 시집간 후 한족 문화를 전파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고, 특히 한나라와의 평화유지에 큰 도움이 됐기에 역사가들은 한나라의 명장 위청(衛靑)이나 곽거병(霍去病)에 못지않다고 평가하고 있다. ‘서시’, ‘초선(또는 우희)’,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대에 많은 문학적 영감을 제공했으며, 특히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원망)’에 나타난 ‘오랑캐 땅에서는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표현은 해마다 봄이 되면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때 보다도 올해가 특히 그렇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재앙 탓에 거리에는 찬바람이 여전하고 사람들의 얼굴 절반은 마스크가 차지하고 있다. 벚꽃을 보아도 감흥이 없고, 그저 ‘코로나 보릿고개’를 얼른 넘어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국산이라 오래가지 못한다’는 우스갯 소리가 들어맞길 진실로 기원하며, 부디 내년에는 ‘춘래불사춘’의 반대말 격인 ‘봄이 오나 봄’이 더 많이 사용되길 기대한다.
 

조남민<홍성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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