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장군은 기독교와는 무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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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장군은 기독교와는 무관할까?
  • 고성은 <광리교회 담임목사·목원대 강사>
  • 승인 2020.09.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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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 100주년 특집 -2

그의 견해처럼 호명학교가 설립되던 시기에 발행된 1908년 8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와 1908년 11월 1일자 ‘황성신문’, 그리고 1909년 5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 등을 종합해 보면 호명학교는 판서를 지낸 김병익과 참판을 지낸 김병수, 군수를 지낸 김병원과 김선규, 그리고 김좌진 등이 발기하고 군수 윤필의 협력 속에서 설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김씨 문중이 설립했기에 1909년 5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는 ‘김문의숙(金門義塾)’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같이 안동김씨 문중의 학교로 설립된 호명학교의 설립 시점은 김좌진과 결부시켜 크게 16세(1905년)설, 18세(1907년)설, 19세(1908년)설 등 세 시기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호명학교를 태동한 갈산초등학교의 ‘갈산초등학교 100년사(2018)’나 그의 생가지에 자리한 백야기념관에서는 1907년을 설립 시기로 단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1909년 5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호명학교가 설립된 시기를 1908년 7월로 명확히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설립 시기로 미뤄 볼 때 탁사 최병헌 목사의 선유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병헌 목사가 남긴 ‘충청남도 선유문안’에 의하면, 당시 정동교회 목사였던 탁사 최병헌은 순종 황제의 명을 받들어 1908년 2월 6일부터 3월 10일까지 충청남도에서 선유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는 선유사로 충청남도 지역을 돌며 “의병운동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양을 몰아서 호랑이를 공격함과 같은 것”이라면서 “의병의 대안으로 민족계몽과 학교의 설립”을 매우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선유활동의 대상자 중에는 갈산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궁내부 특진관인 김병수도 적시돼 있다. 그의 선유활동이 호명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확증할 수는 없지만 시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최병헌 목사의 선유활동은 홍성지역에서 초창기에 ‘명’(明)자를 사용해 설립한 호명학교를 비롯한 팔명학교 외에 유일하게 ‘명’(明)자를 사용하지 않는 사립 보광학교에 대한 단초까지도 제공하고 있다. 이 사립학교를 모체로 해 태동한 결성초등학교에서 발행한 ‘결성초등학교 100년사(2012)’에 의하면 사립 보광학교는 1911년 9월에 창립됐다는 단편적인 연혁만 전해지고 있을 뿐 설립 시기나 설립 주체가 오리무중이다. 

이처럼 학교의 연원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최병헌 목사가 선유활동의 대상자로 적시돼 있는 결성군 현내면 성남리에 거주하고 있던 정인희를 비롯한 몇몇 결성지역 인사들이 그 실마리를 푸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김상기 교수가 저술한 ‘한눈에 읽는 홍주의병사(2020)’에 보면, 최병헌 목사가 선유활동의 대상자로 적시하고 있는 정인희는 청양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발생한 을미홍주의병에도 참여한 바 있었던 매우 민족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 개연성만큼은 담보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좌진을 비롯한 안동김씨 문중은 학업증진과 민중계몽을 위해 조직된 계몽적 성격을 지닌 기호흥학회의 홍주지회에도 참여했다. 기호흥학회의 주요 활동은 근대교육기관 설립 및 후원과 주민에 대한 계몽이었다. 1909년 1월 회장 서병태를 주축으로 해 회원 50여명으로 창립된 기흥흥학회홍주지회는 그 해 4월에 임원진을 개편했다. 이 개편 시 호명학교를 설립한 인사들로 거명되고 있는 인물 중 김병수는 회장, 김좌진은 평의원, 김병익은 찬무장, 김선규와 김병원 등은 찬무원으로 선임됐다. 이외에도 안동김씨 문중 사람들은 임원 혹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처럼 안동김씨 문중은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기호흥학회홍주지회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구세군에도 입참하고 구세군지영 설립에도 함께했다. 1908년 10월 허가두(Hoggard, Robert) 사령관 등 7명의 구세군개척선교단이 한국에 들어온 후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한국구세군은 군대식 조직이라는 특색과 한국인에게 배일사상과 독립정신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짧은 기간에 전국적으로 급속하게 확산돼 갔다. 특히 1909년 7월 ‘구세신문’ 창간호에 의하면, 충청남도에서는 구세군에 대한 광풍이 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성은 <광리교회 담임목사·목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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