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원숭이
상태바
화난 원숭이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10.22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희노애락(喜怒愛樂)의 감정을 느낀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기쁘면 입 꼬리를 올리거나 치아를 드러내어 웃는다. 슬프면 얼굴빛이 어둡거나 눈물을 흘리고,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면서 눈을 치켜뜬다. 인간은 몸으로 여러 감정을 표현한다. 

H는 고3 남학생이다. 지각이나 결석을 자주 하지만 출석 일수를 맞춰야 졸업할 수 있기에 아침마다 무표정한 얼굴로 학교에 간다. 공부에 대한 의욕은 사라진지 오래 됐고 수업시간에는 습관처럼 책상에 엎드린다. 집에서의 H는 학교와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자신뿐만 아니라 중학생인 여동생과 자주 갈등을 일으킨다. 폭언과 폭력이 오갈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를 제지하고, 동생을 보호하는 오빠의 역할을 자처한다. H의 이런 행동은 오래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빈정대는 소통방식에 H는 입을 닫고 살았다. 그런데 중학생 때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와이파이(Wi-Fi)를 끊어버렸을 때, 너무 화가 나서 아버지와 몸싸움을 하게 됐다. 자주 다투는 부모를 보고 가출도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와 동생들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참고 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를 보면 화가 나서 자신의 방식으로 아버지와 싸우고 있다.

현재 H는 거실 한 귀퉁이에 커튼을 쳐서 자신의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는 옷들과 이불이 널브러져 있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저분해 보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H는 아버지를 화난 원숭이로 표현했다. 막내 동생과 놀이를 하다가도 얼굴이 붉어지면서 화를 내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감정 변화가 심해서 갑자기 화를 내기 때문이다. H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그러나 그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H는 과민성장증후군으로 자주 병원을 내원하고 있으며, 비염과 오른쪽 귀 통증과 같은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감정이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해 느끼는 마음이나 기분이다. 찰스 다윈(Chales Darw in)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 1872》에서 인간과 동물은 무의식적으로 몸짓과 표정을 통해 감정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지에 의해 감정을 억제할 수도 있지만, 근육은 의지에 의해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돼 있어서 표정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분노(憤怒, anger)를 참지 못하고 자주 표출하는 사람은 심혈관계의 영향을 받아 얼굴이 붉어지고 자줏빛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며, 목 정맥이 충혈(充血, hyperemia)되기도 한다고 얘기한다. 또한 팔을 들어 올려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사람답게 표현하지 못하고 동물의 수준으로 표현하는 야수성(野獸性)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H는 아버지의 예측할 수 없는 잦은 분노 표출과 명령하듯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다.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한 후 집에 와서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고 자신도 몸이 아파 치료를 받고 있다. 더구나 작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서 온 가족이 놀란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쉬지 못하고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학교를 자퇴하고 그만 다니고 싶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해서 다시 복학했다. 그리고 힘들게 일하는 아버지를 위해 학원도 다니며, 게임 시간도 줄이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무의식에 억압돼 있다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몸으로 나타난다. H의 아버지는 말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얼굴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 H는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몸이 아픈데도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H의 마음에 아버지에 대한 다른 마음이 생기게 됐다.

상담자는 아버지를 염려하는 H의 마음을 알아주고 공감해줬다. 그러자 H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우리 아버지도 마음을 알아주면 화난 원숭이 같은 얼굴표정이 변해서 말로 감정을 표현해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면 좋겠다”고 H는 말한다.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자신의 감정을 동물처럼 몸으로 표현하지 않고, 사람답게 말로 표현하며 살아가면 어떨까요?

최명옥<한국정보화진흥원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박사·칼럼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