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여정 속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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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여정 속 아버지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1.21 08:3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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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 반짝이는 불빛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던 풍요의 계절이 어느덧 겨울 전령사를 맞아 눈인사를 나눌 무렵, 나는 잠시 아버님 댁에 다니러 갔다. 저녁 후에 작은방에서 쉬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방문을 두드리셨다. 아버지는 무엇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는 듯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말문을 여셨다. 

  “이거 좀 보아라.” 하시며 아버지가 책상 위에 내려놓은 건 꼬부랑글씨가 빼곡히 적힌 채 여러 갈래로 구겨진 흔적이 있는 종이 한 장이었다. “아버지, 이게 뭐예요?” “음, 일하다 힘든 게 있어서 말이야!”

  아버지는 내가 군복무 할 때 서울로 이사한 후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마지막 직업으로 아파트 경비원을 하고 계셨다. 하루걸러 밤샘하며 받는 돈은 단출한 가족을 건사하기에도 소소한 금액이었다.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줄곧 힘들게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가족을 돌보았다. 농사일은 물론 만두 공장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가족 앞에서 한 번도 불편한 내색이 없었다. 가족에 대한 무한책임이라도 진 듯이 노년에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단지 내 경비원 중에서 최고령이었지만 특유의 성실함으로 관리업체가 여러 번 바뀌었어도 직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업무 가운데 야간근무 중에는 주차장에 세워 둔 입주자의 자동차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일이 포함되었는데, 밤에는 차량에 흠집을 내거나 차량 안에 있는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밤손님이 간혹 있어 경비원이 곤욕을 치르곤 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내민 쪽지에는 프라이드(pride)라는 영어 단어를 비롯하여 다른 어휘가 상형문자처럼 적혀 있었다. 그것은 글씨 같이 보이는듯하나 차라리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낫다.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던 나는 여럿 사이에 두루 통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각각의 영어 어휘는 차량 이름이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차종은 여러 가지고 색깔에 따라서도 그야말로 다채로운 게 차 이름이다. 한 번도 영어를 배운 적이 없는 아버지는 영어가 외계어로 보였을 테지만 그 낯선 단어와 시름하는 것은 생존과 관계된 일이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운행되고 있는 차량은 수입차나 국산차마저도 한글 이름을 달고 출고되는 차량은 거의 없다. 아버지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미지로라도 차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그림 글씨 밑에 한글로 하나하나 또렷하게 차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말없이 보고 계실 뿐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긴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와 일화는 하나 더 있다. 나는 고교시절을 광주에서 보냈다. 백양사 근처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즈음에 아버지는 광주에 연고가 없던 내게 자취방을 얻어주고, 세간을 갖춰주려고 광주에 오셨다. 시골에서 이장을 겸하며 주업으로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만 원권 묶음을 방바닥에 내려놓으셨다. 농사일로 번 돈은 마치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을 텐데 많은 돈을 자식에게 건네면서도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없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도시로 유학 온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겁에 질린 듯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아버지는 돈의 가치에 대해서 잠시 말씀하시곤 홀연히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하지만 고교 과정을 마친 나는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그때 당시 특수한 지역사회 정황으로 학업을 접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 후로 나는 줄곧 서울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그야말로 정처 없이 인생길을 걷다 보니, 아버지가 신문지로 덮은 만 원권 묶음 속에 걸었던 희망을 품고 뜻깊게 살려 했으나 덧없이 잊고 살았다. 참, 무정하다.

  여든을 훌쩍 넘긴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에서 은퇴하시고 여전히 영어를 잘 모르시지만 차량의 이름만은 지금도 어지간히 기억하고 계신다. 때때로 낯선 차를 보았을 때는 “저 차, 신형이구나.” 하시며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재치도 여유롭다. 내 나이 반백이 지나고 나서야 후회막심이다. 그때 나는 너무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 농부 아버지가 내게 내밀던 신문지 속의 만 원권 묶음과 경비원 아버지가 내밀던 지렁이 모양의 자동차 이름을 그린 알파벳이 떠오르면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그리울 때 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하고 읊조리던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아버지의 품 속 사랑이 몹시 그립다. 농부에서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을 살아내면서 내 삶의 등대 역할을 하신 아버지는 다변화 사회를 헤쳐 나가는 내 삶의 등불이며, 나에게 살아갈 이유가 있음을 알게 하는 새로운 시선이다. 아버지는 나의 삶의 여정에서 늘 함께 걷고 있다.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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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5 08:04:12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cw 2021-01-21 14:29:54
항상 좋은 글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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