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의 실학과 양명학과 천주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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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의 실학과 양명학과 천주교〈1〉
  • 서종태 <前전주대학교 교수>
  • 승인 2021.05.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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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천주교의 수용을 처음 주도한 사람들은 성호학파의 실학자들이다. 그들은 1784년 겨울에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에서 조선천주교회를 처음으로 설립했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전도 없이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서학서를 열람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세계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때문에 성호학파의 천주교 수용은 일찍부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런데 성호학파의 천주교 수용은 단번에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질적인 서양의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해위서는 먼저 그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유리한 사상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때문에 성호 이익이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이후 그의 제자 대와 손 제자 대를 거쳐 증손 제자 대에 가서야 비로소 천주교는 수용됐다.

또한 성호학파의 천주교 수용 과정에서 내포 지역, 그중에서도 덕산 장천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와 두촌면 호동리(현 예산군 신암면 두곡리)에 거주하던 이병휴·홍유한 등과 그 제자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특히 그들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수용하고 이를 경기도·충청도·전라도로 널리 전파시키는 데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내포 지역 성호학파의 학문은 천주교 수용과 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익이 실학을 제기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킨 그 후학들이 양명학과 천주교 수용으로 나가는 학문의 여정은 아래와 같다. 

■ 성호 이익의 실학 체계
이익이 살았던 17~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이르면, 거듭된 당쟁으로 소수의 노론 가문이 정권을 독차지하는 벌열정치가 행해져, 많은 몰락 양반들이 발생했다. 근기 남인에 속하는 이익과 그 후학들의 집안도 그중 하나로, 대부분 서인 또는 노론에 맞서 정치적 투쟁을 벌이다가 정계에서 축출됐다. 

노론 벌열정치가 굳어져 여러 대에 걸쳐 정계 진출이 막히면서, 그들은 급속히 정치적으로 몰락해 갔다. 이러한 정치적 몰락은 점차 경제·사회적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몰락을 초래한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사상의 모순에 눈을 돌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학문적으로 모색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발전시켰다. 

이익의 실학 체계를 살펴보면, 우선 학문의 궁극적 목표를 정주학이 아닌 육경과 사서로 삼아, 정주학을 거슬러 위로 사서와 육경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주학만을 맹종하지 말고 학문할 때 의문을 제기해 자득할 것, 즉 경전을 자주적으로 해석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운다”라고 한 공자의 말에 따라 덕을 이루는 학문은 실천적인 행, 즉 효제를 위주로 해야 하고, 교재도 《논어》와 《효경》을 주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덕을 이루는 공부만으로는 당면한 궁핍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부하게 한 뒤에 가르친다”라고 한 공자의 말에 따라 성덕학과 더불어 사공에 관한 학문도 아울러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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