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비 대통령 박은식의 가르침 : 나라의 독립 회복, 양명학으로 무장해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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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비 대통령 박은식의 가르침 : 나라의 독립 회복, 양명학으로 무장해야〈2〉
  • 노관범 <서울대학교 교수>
  • 승인 2021.08.0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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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영향은 심대했다. 중국은 왜 일본에 패했는가? 근대 서양 문명을 신속히 수용한 일본과 달리 중국은 구습에 젖어 있었고 중국은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서양 선교사들은 상해에 광학회라는 서학 지식 보급 단체를 설립하고 그러한 취지에서 갖가지 한문 서학서를 출판해 중국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청일전쟁을 다룬 영 알렌의  ‘중동전기본말’이나 19세기 서양사를 개관한 티모시 리처드의 ‘태서신사남요’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박은식은 중국발 한문 서학서를 읽으며 대한제국의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는 본래 조선의 성리학 전통이나 한문학 전통에도 해박했으나 신학문 서적을 열심히 읽으면서 신학에도 풍부하다는 평판을 얻게 됐다. 구학과 신학에 달통하고 문장을 잘 짓는 유학자라는 위치, 이것이 대한제국의 위기 상황에서 그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됐던 근본적 힘이었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다시 심하게 요동쳤고, 러일전쟁이 종결될 무렵 창간된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은 그를 주필로 초빙했다.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지배하고 있듯 일본은 곧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수중에 넣고자 공작을 펼쳤다. 을사늑약의 체결이었다. 박은식은 장지연과 협력해 항일 언론을 펼쳤다. 장지연이 ‘애급근세사’를 번역해 영국의 지배를 받는 이집트의 현실을 고발하자 박은식은 이 책에 서문을 써서 동조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논설을 지어 을사늑약 체결을 규탄하고 감옥에 갇히자 박은식은 ‘대한매일신보’에 다시 을사늑약 체결 전말을 소개했다. 그가 편집한 ‘대한매일신보’ 호외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영문 번역과 한문 번역도 실렸다.

을사늑약을 취소하고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상황은 뒤집히지 않았다. 이듬해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와서 초대 통감이 돼 ‘시정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의 국정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한국이 국력을 길러 독립을 회복하려면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사실 을사늑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탁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에 통감을 둬 내정을 장악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었다.

박은식은 을사늑약 이전에는 한국 정부의 자체적인 개혁에 희망을 걸고 교육을 통해 자강을 추구한다는 생각으로 ‘학규신론’ 같은 책을 출간해 정부 부처에 배포하기도 했다. 을사늑약 이후 독립을 잃자 그는 정부에서 사회로 관심의 대상을 바꿨다. 대한제국의 인민이 스스로 사회를 결집해 교육과 실업으로 사회적 실력을 키워 국가의 독립을 회복하자는 전망이었다. 학계에서 말하는 자강운동이란 이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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