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이응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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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이응노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3.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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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화백이 태어날 무렵의 대한제국시기는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1904.2.), ‘한일의정서(1904.2.)’를 강제 체결케했으며, ‘제1차 한일협약’(1904.8.), ‘제2차 을사늑약(1905)’에 의해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자 자주적 개혁을 꿈꾸었던 대한제국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뜻있는 민중은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을 통해 쇠퇴한 나라를 구하려 목숨을 내걸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 이응노 화백은 1904년 음력 1월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응노 화백의 술회에 따르면 그의 가문은 7대에서 9대에 걸쳐 대대로 서당을 열고 마을사람들에게 한문을 가르쳐 왔다. 10대 선조(호 청강, 자 제신)는 시·서·무를 겸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북병사(현 육군총사령관)를 지냈으며, 9대 선조(호 잠와, 자 명준)는 병조참판을 지내며 청백리 칭호를 받았다. 

이후 조선말 동학동민혁명이 외세에 의해 좌절된 후, 1906년 숙부인 청광자 이근주 선생은 홍주의병으로 홍주성전투에 참전했으나, 일본군대 투입과 광포하고 잔학한 의병탄압에 의해 좌절됐고,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조상님 산소에서 제사를 지낸 후 자결했다. 

‘서울-파리-동경(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 대담), 도미야마 다에코 정리, 이원혜 역, 삼성미술재단, 1994’ 도미야마 다에코(富山妙子, 1921.11-2021.8)는 이응노 선생의 도움으로 1982년 3~5월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 파리에서 머무는 두 달여 동안 도미야마는 이응노 부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를 기록한 자료를 책으로 출간했다. 이 일을 계기로 도미야마는 일본미술계와 협력해 이응노·박인경 부부를 1985년 일본으로 초대하여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이응노 부부와 많은 일들을 함께 했다.

이응노 화백이 민족정기와 전통문화예술을 근간으로 자신만의 예술정신을 확립해야 함을 후학들에게 거듭 강조했던 점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실천했던 의지도 이러한 암울한 시대 상황에 따른 경험과 유학적 가풍에서 훈육된 기질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대한제국의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보통학교’ 제도가 운영됐고, 교과목에 ‘도화(미술)’수업이 있었다. 어린 이응노는 보통학교 수업 중 이 도화수업을 가장 좋아했는데 불행하게도 유학자이자 반일론자이신 부친의 식민화 교육에 대한 반대와 서당의 학생들이 현격히 줄어들며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기에 보통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배우는 동안 어린 이응노는 봄부터 가을 추수까지는 밭일을 해야 했고, 겨울 동안은 아버님께 한학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몰래몰래 혼자서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67세가 되던 해(1971년) 프랑스 파리 파케티 갤러리에서 개최된 고암 이응노의 개인전 서문에 실린 글에서 그가 얼마나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는가를 알 수 있는 어린시절에 대한 그의 고백이 있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방해하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고암미술연구소 엮음, 얼과알, 2000)》

그리고 어린 시절의 이응노는 친구들과 함께 월산과 용봉산을 앞마당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던 모양이다. 화백의 삶과 예술노정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 중 유년 시절에 대한 부분은 극히 적은데도 고향에 대한 기억과 용봉산과 월산에 대한 언급은 이곳저곳에서 확인 된다. 

“우리는 산봉우리 하나하나를 다 이름 붙여 불렀다. 부엉이봉우리, 공주봉우리, 까까중봉우리, 거울봉우리 등. 그저 겉모양에 따라 붙인 것이지만 모든 바위들이 사랑스런 몸체로 느껴졌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늙은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그 바위들은 언제나 함께 있다.”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고암미술연구소 엮음, 얼과알, 2000)》

유년시절의 기억 속 고향 풍경이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은 선생의 회고를 비롯 많은 비평가들의 글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선생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따스한 어머님 품속 못지않게 삶과 예술세계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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