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청난사(洪州淸難祠)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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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청난사(洪州淸難祠) 앞에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3.10.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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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15>

 

▲ 백월산 정상에 자리 잡은 홍주청난사.


하늘의 구름처럼
보이지 않는 바람으로 하여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쉴 사이도 없이, 저렇게
제 모습을 바꾸어서야 되겠는가

어두운 밤에는 온자한 달빛으로
흐릿한 낮에는 분명한 햇빛으로
인내할 수 없는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월계천 물 흐르고 흘러
금마 너른 들녘을 적시고
마침내 너른 바다에 이르듯이
삶의 지고지순(至高至純)에 들고 나면

함께 가는 길 위에서
백월과 용봉이 한 자웅을 이루어
지혜의 싹을 잉태하고 있나니
굶주림과 목마름에서 벗어나
하늘의 구름을 탓할 수 있지 아니한가

홍성읍의 진산인 백월산(白月山)은 예부터 무속인들이 많이 오는 산으로 유명하다. 백월산 산신제 역시 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는 있으나 한 차례의 화재손실과 너무 많은 무속인들의 방문으로 인한 등산객들의 불편 등 백월산의 관리를 위하여 최근에는 1년에 두 번 즉, 봄·가을 지정된 날에만 제를 지내고 있다. 특히 가을에는 9월 초하루에 맞춰서 삼일 동안 무속인들에게 산을 개방할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함께 할 수 있다. 백월산 산신제가 홍성에서 예부터 계속 이어온 전통문화행사로 이어오면서 홍가신지신위 행차도 이루어지는데, 홍성군의 군지에 의하면 백월산 산신제를 올리기 며칠 전부터, 필요한 재물을 마련하기 위해 홍가신 지신위 행차 행렬을 해왔다는 이야기가 몇 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홍가신(1541.중종 36~1615.광해군 7)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간옹(艮翁). 아버지는 온이며, 어머니는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에게 수학하였으며,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그와 친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3년 파주목사, 다음해 홍주목사가 되었다. 홍주목사로서 임진왜란 때 난중의 난으로 불리는 '이몽학의 난'을 인근의 장수들과 함께 물리쳤다. 이에 따라 1596년(선조 29)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1604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과 우의정 김명원(金命元) 등의 제의를 받아 5명을 3등으로 나누고 책록하여 청난공신(淸難功臣)이라는 훈호(勳號)를 내렸는데, 1등은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奮忠出氣合謀迪義淸難功臣)으로 홍가신(洪可臣)이었으며, 이에 따라 그는 물론 부모와 처자에게도 3계(階)를 올려주었음은 물론 적장(嫡長)이 녹을 세습하게 했다.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후 그 때부터 홍주(현 홍성)의 사람들은 그를 신(神)으로 모시어 홍가신과 함께 아내와 세 딸의 목각신을 백월산홍주청난사에 봉안하고 지금까지 제를 올리고 있다. 특히 이곳에 와서 홍가신 목사에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설이 있어 지금까지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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