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③ 서울, 만해 관련 유적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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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③ 서울, 만해 관련 유적을 가다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4.1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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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불교·학술활동 주무대… 곳곳에 만해 숨결

유심사 : 
1918년 유심 창간·거처로 사용  유심회 모임 운영해 불교 운동
심우장 : 1933~1944 지내며 말년 보내 서울시 문화유적지 지정 관리
선학원 : 일제시대 불교 개혁 본산지 1921년 설립 민족불교 개척 만해 추모다례제 봉행

 

 

 

 

 

 

 

 

 

 

 

▲ 서울 종로구 만해당

 

 

 

 

 

서울시는 만해 한용운 선사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과 불교·학술 활동을 펼쳤던 주무대이다. 만해는 백담사에서 서울로 올라온 직후인 1928년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인 ‘유심(惟心)’을 창간했고 이듬해인 1919년 기미년 3·1운동에서 불교계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만해는 일제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문초·대질심문 등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결국 이듬해 경성지방법원의 첫 공판에서 내란죄목으로 국사범으로 지목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만해는 서대문형무소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도 독서와 명상에 열중했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여러편의 옥중시를 지었는데 ‘옥중감회’, ‘설야’, ‘추회’, ‘어느 학생에게’, ‘무궁화 심으과저’ 등의 시는 시인으로서의 섬세한 정서와 독립사상이 은유적으로 녹아있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또 만해는 감옥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하며 일본으로 대표되는 군국주의 세력의 야만성을 비난했고 민족의 자결은 인간의 본성인 동시에 세계의 대세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만해는 출소 이후 1923년 경 불교개혁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에 참여하다가 1925년 가을 백담사를 거쳐 오세암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곳에서 한국 근대 저항시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님의 침묵’을 창작하게 된다.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온 만해는 1927년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를 창립했다. 또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한 만해는 1931년 ‘불교’지를 인수해 사장에 취임하고 불교개혁을 통한 대중화 운동을 이끌었다.
1933년은 만해에게 매우 뜻 있는 해이다. 재혼을 하고 입적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거처하게 되는 자택 심우장을 마련한 것이다. 이곳에서 만해는 ‘흑풍’, ‘박명’, ‘후회’ 등의 신문연재 소설과 적지 않은 글들을 집필했다. 재혼 이듬해인 1934년 9월에는 현재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유족 대표인 한영숙 여사가 태어났다. 이후로도 만해는 1839년 회갑에 이르기까지 재정난으로 휴간됐던 ‘신불교’를 재창간했으며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청년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벌였다.
◇유심사
유심사는 만해가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제3호까지 발행한 곳으로 만해의 거처로 사용되던 곳이다. 또 3·1독립운동을 위해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 교섭을 마무리한 최린이 한용운을 방문해 불교계의 참여를 허락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통권 3호에 그친 ‘유심’이지만 문학사적, 독립운동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종로 계동 43번지 유심사도 역시 그렇다. 실제 유심사는 불교계 3·1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의 민족 대표로 불교계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2명밖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불교 종립학교인 중앙학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제 2월 28일 밤 만해는 거처 유심사로 학생들을 급히 불러 모아 독립선언서의 작성경위와 3·1운동의 의미를 설명한 뒤 선언서의 배포를 부탁했다. 이날 모인 신상완·백성욱·김상헌·정경헌·김대용·오택언·김봉배·김법린 등은 중앙학림 안에서 한용운의 지도하에 ‘유심회’라는 모임을 운영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렇게 불교와 독립운동 면에서 모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심사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제대로 된 표지판조차 없었다. 2012년까지 ‘유심사’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종로 계동 43번지가 아닌 58번지 우물터에 설치돼 있었다. 이후 일간지 보도와 비판이 이어지자 표지판은 본래 자리를 찾게 됐다.
현재 종로 계동 43번지 유심사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만해를 느낄 수 있게 됐다. ‘만해당’이라는 이름의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유심사는 한동안 일반 가옥으로 사용되다가 낡아 매물로 내놨던 것을 다른 일반인이 재테크를 목적으로 구입했다. 그 이후 방치되던 것을 인근 주민이었던 이유리 만해당 대표가 장기 임대해 게스트 하우스로 꾸몄다. 각국의 길손들은 만해가 눕고, 먹고, 사색했던 집에서 하루의 여정을 정리하며 만해의 향훈을 느끼고 있다.

 

▲ 성북구 심우장

 

◇심우장
심우장(尋牛莊)은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경신고교 언덕을 넘어 가거나 동소문동 입구에서 복개한 성북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85번 버스 종점을 만나게 된다. 85번 버스 종점 약간 못 미쳐서 좌측길 골목으로 30여m 언덕으로 오르면 심우장을 마주하게 된다.
심우장은 서울시 지정 107호의 문화유적지가 되고 성북구청에서 특별 관리하고 있다. 대지의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이 심우장과 직교하며 동향으로 서 있다.
심우장이 자리한 성북동은 원래 성 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였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고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심우란 뜻은 ‘무상 대도를 깨치기 위한 집’이란 뜻으로 선생의 일생이 그러한 것처럼 늘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심우장 시절 만해에게는 적지 않은 일화와 대쪽 같은 성격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비화가 있었다.
일례로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지은 육당 최남선이 변절한 후 아는 척을 하자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었소’라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든가 역시 3·1운동에 참여했으나 변절한 최린이 심우장을 찾아왔을 때 어린 딸 영숙에게 100원을 전해주고 갔는데 이를 안 만해가 크게 꾸짖고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돈을 던지고 돌아왔다는 등의 일화가 그것이다.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 일대는 1930년대 서울이 확장되면서 주거지로 개발되었는데 이 집은 당시의 여느 집과는 다르게 검소하고 소박한 구성을 보여준다.
만해는 조선의 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승려이자 조국의 독립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며 근대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이다.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은 그의 이 같은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 만해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선학원 불당 내부

 

◇선학원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고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생가와 안국역 사이 중간쯤 좌측에 우뚝 서 있는 절 하나가 있다. 바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 불교 개혁의 원산지인 선학원(禪學院·종로구 안국동 40번지)이다.
선학원은 1921년 11월 30일 만해를 비롯해 남전·도봉·석두·만공·성월·용성 등 스님들에 의해 설립됐다. 특히 선학원은 일제 식민지시대 친일파와 관련 인사들이 어용 스님을 내세워 우리 민족 불교를 일본 식민지 불교로 하려하자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곳이기도 하다.
만해는 특히 선학원 설립해 참여한 인물 중 만공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근대불교 개혁, 민족운동, 한국 전통 불교고수, 자존심의 몸부림을 위한 일제하의 고난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었다. 당시 만해는 일제 식민지 통제를 전면 부정하면서 민족불교를 개천한 반면 만공은 식민지 현실을 일부 인정하면서 선불교 전통의 고수를 통한 민족불교를 개척한 이였다.
현재 선학원에서는 공동설립자 중 하나인 만해를 기리기 위해 매년 추모다례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매년 다례제에는 선학원 이사장, 한영숙 여사를 비롯해 광복회 사무총장, 중앙선원 재가신도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스님을 업적을 기리고 있다.
올해는 만해가 열반에 든지 정확히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학원 관계자는 “올해 추모다례제는 예년에 비해 보다 풍성하고 장엄하게 치르기 위해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 중에 있다”며 “선학원 설립조사이자 이곳에서 불교지 선원을 창간한 만해 스님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기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혜동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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