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에 반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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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반하는 사랑
  • 윤여문<청운대 교수, 칼럼위원>
  • 승인 2014.05.0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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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부터 어둡고 무거운 주제의 문학을 좋아하면서 차츰 내성적이고 냉소적인 성격으로 바뀌어갔다. 나이에 맞지 않는 독서는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또래 아이들이 읽는 ‘소년중앙’이나 각종 무협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연히 사춘기를 시작하는 계집아이들이 읽는 하이틴 로맨스 소설도 읽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 보다는 오히려 ‘경멸했다’가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서 첫 눈에 반한다는 식의 ‘하이틴 로맨스 소설’보다는 내가 즐겨 읽는 작품들이 오히려 더 깊이 있다는 섣부른 우월감도 있었다. 첫 눈에 반하는 사랑? 정말 손끝이 오글거리는 일이었다.
유학시절 큰아이가 태어났다. 도와줄 가족이 전혀 없는 외국에서 아내와 단둘이 첫째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가장으로서 애써 의연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아내의 배가 불러올수록 공포심은 더해갔다.

아빠로서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을지는 고사하고 내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준비가 되어있는지 조차도 몰랐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아빠’라는 위치가 여간 부대낀 것이 아니었다.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는 집에 생전 처음 보는 갓난아이가 끼어든다는 것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열두시간이 넘는 긴 진통이었다. 엄마의 양수 속에서 갓 나온 아들의 얼굴과 손발은 할머니의 피부처럼 쪼글쪼글했다. 심지어 한 쪽 귀까지 접혀있어 꽤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나는 매우 진지하고 경건했다. 놀라운 일은 그 ‘쪼글쪼글’한 모습으로 빽빽거리며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마자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그 ‘쪼글쪼글’한 아이와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것도 첫 눈에 말이다.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있으면서 느꼈던 두려움, 온전히 사랑을 전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던 나의 알 수 없는 무능함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상에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첫 눈에 반한 사랑’을 나는 서른 살에 경험한 것이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어느새 13년이 지났다. 그 사이 일곱 살짜리 딸아이도 생겼다.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하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로서 수많은 일들을 겪어왔다. 모든 병원들이 문 닫은 주말, 그것도 새벽 두어 시쯤 40도에 육박하는 열이 내리지 않아 종합병원 응급실로 뛰어간 것도 여러 번이다. 앞집 꼬마아이와 싸워 대신 그 집 부모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돌아온 일도 몇 번이고, 변비에 걸린 아이에게 좌약을 넣고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알아낼 요량으로 아이의 대변을 맨손으로 만지기도 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눈을 못 뜨고 한동안 자지러지게 우는 딸아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기도 했고, 자전거 뒷바퀴에 발이 끼어 며칠을 걷지 못했던 딸아이를 볼 때마다 나의 부주의를 심하게 자책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밖에 내다 놓으면 바람에 날아갈까 걱정이었고, 너무 예뻐서 꼬옥 껴안으면 갈비뼈 부러질까 무서워 마음껏 껴안지도 못하는 내 자식들이다. 참 놀라운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은 여느 사랑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랑의 크기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무한한 행복을 준다. 마치 내 인생을 의미 있는 삶으로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이렇게 애지중지 키워왔던, 함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왔던 우리 시대의 아이들이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사고를 당했다니 자식 키우는 아비로서 참담한 심정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몇 주가 넘도록 저 시커멓고 차가운 바다 속에 남겨져 있으니 슬픔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내 자식 귀한데 남의 자식 또한 어찌 안 귀할까.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학생 부모들 마음이야 오죽할까. 생목숨이 그렇게도 질기다는데 우리의 아이들은 어찌도 이리 허망하게 사라졌을까. 그저 함께 마음 졸이며 눈물 흘리는 일밖에 할 수없는 내가 너무 안타깝다.

우리가 ‘첫 눈에 반한 사랑’들이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 잠에서 깼을 때 그 ‘사랑’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씨익 웃으며 식탁에 앉아있었으면 좋겠다. “매우 슬픈 꿈을 꾸셨군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예요”하면서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소원이 없겠다. 정말 소원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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