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월산에 뜬 새벽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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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산에 뜬 새벽달
  • 방한구<홍성읍>
  • 승인 2014.10.2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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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과 추분 사이에 뜬 새벽만월은 마치 찬 물기를 내려주듯 그 청량함이 무엇에 비유할 수 없다. 지난 여름 열대야에 뒤척인 몸과 마음을 고즈넉하게 가라앉혀준다. 게다가 지난밤 동쪽 초롱산 위에 덩그렁 걸린 것을 보고 잠들었는데 새벽에는 백월산 오른쪽 끝, 바로 내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언가 가슴을 어루어만지는 듯 해서 깼는데 달빛이었나보다. 발치 끝으로 머리를 두고 거꾸로 눕자 새벽달이 내 속으로 달려 내려오는 듯 하다. 내가 달이고 달이 나인 듯 그야말로 월아일체(月我一體)다. 몸과 마음이 세정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럴 때엔 앞으로 매 순간을 이렇게 맑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이 가슴에 그득히 차오른다. 그러나 어느새 본 태성 속기(俗氣)가 솔솔 피어오르면 마음은 금세 간사해져서 달빛에 부탁할 이런저런 기원 리스트를 준비하고 있으니 속물의 근성은 참 뿌리도 깊다. 내게 새벽 자투리 시간은 하루 중에서 가장 바쁜 때다.

이불 속에서의 몸 풀기, 하루 일정 정리, 등산, 야생화 물주기, 친구와 점심먹기, 독서, 자녀와의 전화 대화 등의 일들이 서로 앞자리를 다투고 있다. 이런 내게 새벽 달빛은 속도 완화제 역할을 한다. 심호흡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이끌어준다. 오늘은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달빛에 취해 새벽시간을 모조리 썼다.

그 빛을 옆자리에 앉혀놓고 하루 일정을 점검해도 좋고, 그 빛을 바라보며 산혜암 가는 단풍나무 숲을 걸어도 좋다. 그 빛을 가슴에 안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더더욱 좋다. 노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순간이다. 백월산에 이사 와서 받은 선물 중 가장 큰 것은 주위를 감싸고 있는 자연이 준 것이다.

백월산은 간결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아기자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 속은 또 얼마나 깊은지 바라보면 손가락 끝만 까딱해도 녹음의 바닷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 하다. 아주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그린홀이다. 그 속에 조금만 발을 들여놓아도 온 몸이 녹즙의 특급 마사지를 받는 듯 하다.

그 왼쪽에 있는 용봉산은 바위를 성큼성큼 드러낸 모습이 우람하고 너그러운 남정네 모습이다. 특히 비,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어느 여인네도 견디지 못할만큼 고혹적이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달려 나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향토화가 임화백이 왜 비 갠 뒤 백월산 모습을 그렸는지 한숨에 깨우쳐 준다.

아침이 시작될 때면 나는 가슴의 단추를 활짝 열고 우람한 가슴에 새로 뜨는 해를 그득 담아서 손자 성원에게 보여준다. 나와 달 사이에 자리한 산혜암의 점잖은 질책이 못내 두렵다. 눈을 돌려 홍성읍내를 내려다보면 고층아파트 사이로 초롱산과 오서산이 살짝 보인다.

밤에는 롯데마트의 불빛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등불 잔치를 벌인다. 시선을 집 아래 마당 산길로 옮기면 새벽 정적을 깨고 등산객들의 발걸음과 숨소리는 아련한 추억의 끈을 길게 쥐여준다. 지난밤에는 태풍의 끝자락으로 비와 안개와 바람도 심상치 않다.

고즈넉이 머물러서 주위를 잠시 지워버리는 안개가 아니고 마치 격렬한 리듬에 맞추어 춤이라도 추는 듯 그 움직임이 아주 역동적이다. 바람까지 그 뜻을 따라 줄 때는 단거리 선수도 되고 마라톤 선수도 된다. 산의 위쪽과 아래쪽 산과 산 그리고 산과 사람들 사이의 혈(穴)을 오가며 기(氣)를 터주는 듯 하다.

매일 새 작품을 바꿔 거는 명화 전시장이나 진배없다. 우기의 백월산은 구름과 안개가 두꺼운 커튼처럼 드리워졌는데 그 커튼을 키네틱 작품처럼 산을 한차례 흔들고 내려와서는 그곳을 바라보고 사는 주민들의 마음까지 설레설레 흔들어 놓는다.

그 격렬함이 극에 달했을 때는 산에 불이나 연기가 덮인듯해서 가슴이 둥둥 뛰곤 한다. 백월산에 산지도 30여년이 되어오건만 참 행복하다. 백월산은 홍성군민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역사와 삶의 흔적이 묻어 있다.

눈만 돌리면 푸른 산과 숲, 그윽하고 고적한 정취를 오래오래 누리고 싶다. 홍성군민들은 백월산을 가꾸고 다듬어 지역의 명물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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