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고 ‘양지회 야학’과 ‘홍성직업소년학교’의 상록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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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고 ‘양지회 야학’과 ‘홍성직업소년학교’의 상록수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6.02.26 07:06
  • 호수 930호 (2026년 02월 26일)
  •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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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잊혀진 홍성교육사③
1969년 7월 30일 홍성직업소년학교 교실신축기금(敎室新築基金) 마련을 위해 전 교직원과 학생들이 전국 순회모금에 나서기 앞서 기념촬영을 했다.

1945년 일제강점기로부터의 해방과 1950~1953년 6·25 한국전쟁의 폐허로, 배고픔을 떨쳐낼 수 없었던 시절의 역사 속에서 이 땅의 국민들에게 하나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소망이었다. 이러한 소망은 어른이나 청소년, 아이들의 한결같은 꿈이었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원조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나라로 분류됐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은 불과 24년 만인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고, 1인당 국민소득도 1000달러를 넘어섰다. 자본도 자원도 변변치 않던 나라가 세계에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 압축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항제철과 조선소, 고속도로 같은 물적 인프라가 있었다. 2025년 기준, 대한민국은 1인당 GDP 3만7000달러 수준에 이르렀고, 반도체·자동차·K-문화로 대표되는 세계 12대 경제 대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같은 변화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1960~1970년대 독일에 근로자 파견(파독)과 베트남 파병의 피땀, 중화학공업 육성, 경부고속도로 건설, 영일만의 신화 포항제철 건설, 새마을운동과 산림녹화, 자주국방의 결단. 이러한 국가적 도약의 출발점에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전략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그 이면에는 권위주의와 독재라는 비판 역시 존재하지만 말이다.

최근 우리 정치와 경제가 동시에 흔들리는 불안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발전의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주역으로 평가받아 온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전략 중에서도 ‘교육개혁’에 대한 전략적 정책이 재조명되고 있다. 1965년 기준으로,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진학률이 50%, 고등학교는 34%, 대학교는 7%대였던 데 반해 2024년 기준 통계로는 이 수치가 100%, 96%, 75%로 수직 상승했다.

당시 중학교 진학률이 50% 수준에 머물렀던 시절,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 절반 이상은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과도한 입시경쟁은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고, 1968년 서울에는 중학교 재수생만 8000명이 넘었던 시절이다. 이즈음 홍성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은 야학으로 몰렸다. 홍성고등학교 재학생들에 의해 홍성지역에서 최초로 시작된 야학 ‘청석중학원’과 ‘양지중학원’이 통합, 230여 명이 몰려들면서 ‘홍성직업소년학교’로 발전했다. 1969년, 그 시절의 홍성지역 교육의 현장이었던 ‘홍성직업소년학교’와 관련한 이야기다.

■ 홍성직업소년학교 ‘지게선생님’과 학생들
‘서울신문’ 1969년 8월 7일 자 ‘지게 선생님’ 제하에 -서투른…그러나 흐뭇한 막벌이-한 칸의 교실 기금 위해 洪城서 서울에-란 부제를 단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바캉스 인파로 붐비는 서울역 광장에 지게를 진 선생님과 모금함을 든 학생들이 배움터를 마련키 위해 땀을 흘리고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허름한 작업복에 텁수룩이 자란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어딘가 지게 솜씨가 서투른 선생님 지게꾼은 ‘홍성직업소년중학교(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교장 정덕영(鄭德泳·26) 씨와 교감 이상근(李相銀·24) 씨. 정·이(鄭·李) 두 교사들은 방학을 이용, 지난 3일 하오 2시 학생 주영숙(朱英淑·15) 양 등 18명과 함께 상경, 선생님은 지게를 지고 학생들은 모금통을 들고 번화가를 헤매며 돈을 모아 모자라는 배움터를 지어 공부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뭉쳤던 것이다.

교장 정(鄭) 씨가 1964년 10월 홍성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면서 세운 이 학교의 학생 수는 2백32명. 30평짜리 목조교회 건물 한 개와 천막 교실 한 채로는 시설이 너무나 빈약, 학생들이 앞장서 교실 확장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학생들은 방학 이틀 전 학생회를 열고 교사 6명 전원과 학생들로 반을 편성, 서울을 비롯 대구 등 전국 주요 도시에 나가 막벌이와 가두모금에 나서기로 했던 것. 정·이(鄭·李) 두 교사는 상경 첫날 지게를 사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벌이에 나섰으나 하루 벌이 7백여 원이 고작. 학생 김기숙(金基淑·15) 양은 장마 때문에 모금이 안돼 큰일이라면서 ‘6일도 겨우 1백 60원밖에 모으지 못했다’고 근심스런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그동안 1백5명의 졸업생을 낸 이 학교는 졸업생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23명이 합격하고 47명이 새 직장을 얻었으며 35명이 자기 고장 개발에 헌신하고 있다는 것. 정(鄭) 씨는 또 현 재학생의 3분의 2가 공인 주산 3급 이상의 실력자들이라고 자랑이다.”라고 당시 서울신문 장석영 기자가 쓴 기사가 실렸다.

중앙일간지 등 각종 매체에 제자들의 배움터를 마련하기 위해 상경, 서울역에서 지게를 걸머진 ‘지게 선생님’에 대한 사연이 기사로 실리자 ‘지게 선생님’에 대한 온정도 밀려들었다.

1969년 8월의 ‘서울신문’의 온정 보도를 살펴보면 ‘△서울 동대문구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전병곤(田炳坤·33·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403)씨는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면서 5천원을 서울신문사에 보내왔다. △수원시 세류동 955에 사는 이상복(李相福·44)씨는 막벌이로 푼푼이 모은 성금 1천원을 교사들에게 전해달라고 서울신문사 수원지사에 맡겨왔다. △서울 중구 동자동 성남교회 장대웅·이해웅 목사는 교사와 학생들이 서울을 떠날 때까지 숙식을 제공해 주겠다고 나섰다.’는 등의 기사가 실린 것이 확인 된다.

1969년 7~8월 여름방학을 맞아 홍성직업소년학교 청년 교사와 학생들이 ‘우리 배움터는 우리 손으로 마련하자’고 교사(校舍) 신축비(新築費)를 마련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 서울역에서 지게품팔이를 하던 정덕영(鄭德泳·26) 교장(사진 오른쪽)과 이상근(李相根·24) 교감(사진 왼쪽)이 서울역 광장에서 지게품팔이를 하고 있는 모습. -1969년 8월 20일 자 조선일보

■ 청년교사·청소년들, ‘배움의 기적 일구다’
이렇듯 홍성고등학교 ‘양지회’ 회원들이 시작한 야학인 소향리 땅굴 움막교실 ‘청석중학원’에는 45명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소녀들이 몰려들었지만 제1회로 졸업한 학생은 전덕근, 최재숙, 노순자 등 4명이었다. 전덕근 졸업생은 이후 양지회 교사로 봉사하던 이헌운 교사의 권유로 대전 호수돈여고를 졸업한 양지회 제1회 졸업생으로 기록되고 있다.

소향리의 움막교실이었던 ‘청석중학원(靑石中學院)’과 금마 죽림리 천주교회의 공간을 이용하고 있었던 ‘양지중학원(陽地中學院)’은 1965년 9월 3일 ‘홍성직업소년학교(洪城職業少年學校)’로 통합하고, 학교를 소향리 움막교실에서 대교리 지금의 안식일교회가 있는 자리에 비어있던 교회 건물로 이전했다. 그러나 1969년에는 불우한 소년·소녀들을 포함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더 몰리면서 총학생 수가 232명(남학생 127명, 여학생 105명)으로 늘어났고, 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비어있는 교회 건물을 이용해 교회 마당에 천막교실을 짓고, 홍주의사총 등에서 야외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이 뜻을 모아 7~8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배움터인 교사(校舍)를 신축하기 위한 금액 100만 원을 모금하기 위해 전국(서울권·경상권·대전충청권)으로 모금함을 들고 모금 운동에 나섰다.

1969년 7월 30일, 학교(學校) 교실신축기금(敎室新築基金) 마련을 위해 전 교직원과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전국 순회 모금에 나섰다. 교사와 학생 48명이 5개 반으로 편성, 방학 기간 30일 동안 전국에 모금 원정에 나섰던 사연이 중앙일간지 등에 소개되면서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사연을 보고 당시 홍종철 문교부장관이 30만 원을, 충남 출신 국회의원들의 찬조금 등 모금 운동을 통해 100만 원 목표금액 중 95만 원이 모금됐고, 교사와 학생들은 나머지 부족분 5만 원을 채우기 위해 다시 대전을 찾아가 모금 운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1964년 10월, 홍성고등학교 1~3학년 학생 45명으로 조직된 ‘양지회(陽地會)’ 출범은 이들이 홍성읍 소향리 산 171번지 황무지에 땅굴을 파 움막교실을 짓고 ‘야학(夜學)학원’인 ‘청석중학원(靑石中學院)’을 설립하는 출발점이 됐다. 또 금마면 죽림리 천주교회의 비어있는 공간에는 ‘양지중학원(陽地中學院)’을 설립했다. 1965년에는 ‘청석중학원(靑石中學院)’과 ‘양지중학원(陽地中學院)’을 통합해 ‘홍성직업소년학교(洪城職業少年學校)’로 발족했으며, 1969년 7월 학교(學校) 신축기금(新築基金) 마련을 위해 전 교직원과 학생들 48명이 전국을 순회하며 모금 운동을 실시했다. 

이러한 모금 운동의 결과로 1972년 4월 1일 교실(敎室) 7실의 본관(本館)을 완공하고, 1974년 11월 16일에는 교실(敎室) 2개 교실을 증축(增築)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1977년 7월 ‘홍성재건학교(洪城再建學校)’의 통합을 통해 ‘홍성새마을청소년학교(洪城새마을靑少年學校)’로 개명(改名)하고 새롭게 출발했다, 이후 홍성 복지중학교를 거쳐 1980년 9월 1일 ‘청석수련원(靑石修練院)’을 개원했으며, 1985년 11월 16일 ‘사단법인 청석수련원(社團法人 靑石修練院)’ 이전을 위한 신축청사 기공식을 가졌다. 당시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 용봉산 기슭 1만 2000여 평에 4억 5000만 원을 들여 441평 규모의 청석수련원 새 건물을 세웠다. 청석수련원에서는 청소년 교육과 이·반장을 비롯해 새마을지도자, 공무원, 서비스종사자 등 민간의 성인 교육기관의 역할과 기능을 하며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 이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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