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와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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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와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사회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5.07.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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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헐크’의 주인공인 배너 박사는 유전공학계의 젊은 과학자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혁신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예기치 못한 연구 결과로 분노를 조절할 수 없는 부작용을 갖게 된다. 그는 자기 내부의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두 개의 자아를 갖게 되었다. 온건한 자아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자아. 그는 외적인 스트레스 상황 즉, 자신이 위험에 처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드라마틱하게 변신한다. 화가 나면 변신하는 자신을 배너 박사는 힘들게 받아들인다. ‘헐크’와 비슷한 내용인 공포 소설의 고전 ‘프랑켄슈타인’도 재미있다. 천둥번개가 치는 어느 날,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생명의 근원을 밝힐 수 있는 오랜 연구의 결실을 맺는다. 그는 시체 몇 구(具)의 부분을 모아 누더기처럼 기워놓은 사자(死者)의 몸에 오직 신(神)밖에 할 수 없는 생명을 불어 넣는 것에 성공한다. 생명의 원인을 발견한 것에 기뻐해야 할 순간에 자신이 창조한 괴물 같은 피조물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더군다나, 본인의 모습을 본 괴물도 깊은 절망감에 빠져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험악한 복수를 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이 영화와 소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충격을 온 몸으로 겪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은 부당함과 모멸감,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절규하면서 증오와 분노로 복수한다. 얼마 전, 서울 강남의 좁은 골목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일방통행 길을 역행하여 들어오는 승용차와 빠져 나오려는 택시가 도로 입구에서 시비가 붙었다. 교통 법규상 명백한 승용차의 잘못이었지만 택시가 승용차를 먼저 보내는 배려가 있었다면 전혀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택시는 길을 막고 경적을 몇 번이나 시끄럽게 눌러댔다. 이내 운전석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일방통행 도로에서 무슨 짓이냐”고 타박하기 시작한다. 잘못한 승용차 운전자도 창문을 열고 자신보다 연배가 훨씬 많은 택시 운전자에게 반말로 대꾸한다. 서로가 예의와 인격의 끈을 놓아버린 순간이다. 그들이 옥신각신 하는 사이 주변의 교통은 한동안 정체되어 있다. 그 소동 덕분에 가뜩이나 막히는 강남의 도로는 긴 대기 줄이 만들어졌다. 여기저기 정체된 차들이 신경질적으로 번갈아 경적을 울린다. 날씨 좋은 주말의 강남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지하철이나 버스, 심지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것이 불편하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 좁은 공간에서 낯선 타인의 무표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한다면 곧바로 보복을 할 수 있다는 긴장 태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며칠 전 뉴스에서는 한 노인이 지하철 복도를 지나다가 젊은이와 실수로 부딪쳐 아찔한 폭력사태로 번진 일도 있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폭발한다. 격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특정한 상황에서 손해를 볼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일종의 피해의식인 셈이다.

지난 과거, 우리 사회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겪어왔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천안함 폭침과 세월호 침몰 등 우리 사회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너무 막심했다. 이러한 굵직한 사건 앞에서 어린이집 교사의 아동 폭행과 길거리 ‘묻지마 살인’ 등은 이제는 더 이상 이슈 거리도 안 되는 작금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정부의 대응은 미흡했고 절망하는 국민들은 위로받지 못했다. 실망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탓하며 분열했다. 불안한 국민들을 보듬어야 할 국가는 제 기능을 못하고 국민에게 부당함과 좌절감이라는 스트레스를 안겨주기만 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는 국민들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와 사회에 부정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좌절과 실패, 절망과 배신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사회 구성원은 ‘나와 내 가족은 내가 알아서 지켜야만 한다’는 과도한 피해의식을 갖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이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헐크’와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어디에도 서로를 배려했던 동방예의지국의 자긍심은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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