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秋夕)의 추억(追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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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秋夕)의 추억(追憶)
  • 주호창 <광천노인대학장>
  • 승인 2015.10.0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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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그토록 무덥던 더위도 물러가고 염려했던 태풍 고니도 조용히 사라지고 일촉즉발의 전쟁에 대한 공포도 잠든 채 세월의 나침반은 9월의 문턱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가까이 다가오는 황금연휴의 추석이 우리를 오라고 손짓하는 유난히도 밝은 초가을 달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에 오기까지 적어도 70번의 추석을 맞이했던 것이 아닌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추석을 생각하며 옛 추억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물론 1950년대의 사회상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난이며 대가족제도로 좁은 방에 식구는 많고 먹을 것은 적어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급한 방법 중에 하나가 무작정 상경이었다. 이 때 추석은 경제적인 빈곤은 물론 문화적 혜택이 없는 암흑기라고 할까! 가끔 도시의 잔유물로 밀려와서 이동가설극장에서 상연되던 흑백 무성영화가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아마도 그런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인지 추석 때가 되면 각 마을마다 연극을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퍼졌다. 연극이라야 전기가 없으니 조명은 생각도 못한 상태에서 허술한 소품이나 초라한 배경의 모습은 가히 짐작이 될 것이다. 오늘날은 범죄행위로 문제가 되겠지만 그때는 연극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할 돈이 없어 남의 밭에 고추를 따다 팔았던 추억! 이제는 너무나 풍족한 문화적 혜택과 최첨단의 기계들이 우리를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게 하고 있을까!

또한 추석하면 떠오르는 것이 성묘이며 가까이에서부터 멀리까지 조상의 묘소를 찾는 성묫길에는 친척들과 한 나절을 걸어야 했던 행렬은 장관이기도 했다. 이 때 빠지지 않는 것은 야산의 밤나무에서 밤을 따다가 밤송이를 맞아 눈언저리가 뻘겋게 멍이 들고 벌집을 건드려 손등이 부어오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지금은 편리하게 자가용으로 그것도 형제들만이 다녀오기에 친사촌이 이웃사촌 보다 멀어지게 되는 것 같고 핵가족으로 아들, 딸 하나를 낳는 것이 보편화되니 삼촌이나 이모 등의 친척에 대한 개념도 변화되고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름밤마다 죽마고우들이 모여서 놀던 모래강변의 놀이가 추석에 최절정을 이루게 되는 추억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그 당시에는 각 가정마다 적어도 2~3명의 아이들이 있기에 시골의 작은 학교 전교생보다 많은 2~30명이 자연스럽게 모여서 씨름이나 기마전도 하고 표 뺏기를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결국 무의식중에 공동체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협동심이 배양되기도 했다.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아련한 추석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기 어렵고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성이 결여될까 염려가 된다. 이제는 추석에 대한 풍속도도 달라지고 특히 명절증후군이란 신조어가 생기듯이 즐거워야할 추석이 부담스럽고 힘든 갈등의 고개가 되지 말아야겠다. 한가위의 보름달처럼 원만하고 풍족한 삶에서 희망을 가슴 가득히 추억을 품는 추석을 맞이하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 나쁘게 변질되어가는 추석 문화가 아닌 현대 감각을 가미하여 아름답고 행복하게 변화 내지 승화된 추석 명절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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