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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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권기복<시인·홍주중 교사>
  • 승인 2015.12.3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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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이자,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어라’와 함께 3대 장편소설 중의 하나이다. 1920년 대, 1차 세계대전 후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전쟁의 참상을 겪은 젊은이들의 공허와 불안이 공존하는 시대의 자전적 소설이다. 파리 특파원인 제이크 반스는 세계대전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젊은 예술가와 지식인들과 함께 우울의 나날을 만취 상태로 살아간다.

그 중에서도 영국인 간호사인 브렛을 두고 여러 친구들 간에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의 격동은 에스파냐 축제와 투우 관람을 간 산페르민에서 폭발한다. 일주일간 만취 상태에서 보낸 그들에게 ‘도덕’이나 ‘윤리’는 전쟁을 통해 송두리째 깨진 상태였고, ‘미래’나 ‘희망’은 이미 산산조각 난 꿈과 같은 것이었다. 전쟁에 대한 환멸과 삶의 방향을 상실한 그들은 ‘길 잃은 세대’였던 것이다. 위 소설은 27세의 헤밍웨이를 금세기 최고의 미국 소설가로 만들었다.

청양(靑羊)의 해인 을미년을 접고, 병신년(丙申年) 새해를 맞이하는 와중에 필자는 왜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그 무엇인가가 잡힐 듯하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2015년 한 해를 살아가면서 느낀 것은 한국사회에 대한 환멸과 상실이 아닌가 싶다. 푸른 꿈을 가지고 양떼처럼 순박하고 단란하게 살 것이라던 희망이 막상 한 해를 보낸 자리에서, ‘영영 아니었구나!’라는 자괴감이 앞서기 때문이리라.

아마 행복한 삶이란 것은 재미있게 사는 것일 게다. 한 순간을 살더라도 뭔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주변에서 나를 웃겨서 재미있거나 내가 하고자 한 일이 잘 되어 재미있을 수도 있다. 또는 이웃과 사랑하고 아끼는 관계가 더욱 돈독하게 되어 재미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요소가 없다. 정치는 독선과 분열만을 보이고, 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으며, 사회는 인성과 배려를 앞세우지만 업신여김과 불신의 장벽만을 서로 높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작금에 이르러 전쟁을 치룬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윤리를 내버리지도 않았다. 전국 공무원에게 ‘청렴문화’가 강조된 지 꽤 오래되었고, 학교에서 인성교육이 강조된 지도 꽤 되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사회가 얼마나 더 청렴해졌고, 아이들 인성이 더 좋아졌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정부정책이란 것들은 그저 허공에 떠도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럼 어쩌다가 한국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우리 사회에 존중과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진 많은 시민들이 ‘자기 밥그릇’만 지키려고 들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은 당리당략에 빠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은 공무원의 하부조직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하여도 상부조직의 변화가 없다면 청렴하다고 믿지 않는다. 결국,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 속담처럼 위정자들이 변해야 한다. 그들이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헤밍웨이는 전쟁에 대한 환멸과 공허에 빠진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고 하였다. 그들의 끝없을 것 같은 어둠도 결국 그 끝은 있기 마련이며, 그 끝에서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새해맞이 기원을 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윗물부터 정화되고, 아랫물도 동화되어 서로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보자고 다시 떠오르는 해(태양)에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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