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맑고 공기 좋고 인정 넘치는 장수마을 월계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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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맑고 공기 좋고 인정 넘치는 장수마을 월계1리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6.07.2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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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20>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장곡면 월계1리마을
장곡면 월계1리 마을 전경.

◇인심·환경 좋아 살기 좋은 마을
월계1리 마을은 1980년대까지는 월계1, 2리가 분구되지 않아 다같이 월계리를 합해 대동계를 구성해 운영했으나 1980년대 초 1리와 2리가 분리되면서 자체적인 대동계를 운영하지 않게 됐다. 이처럼 대동계도 없고 마을조직이 다양하게 구성되지 않았음에도 월계1리의 화합은 남달랐다. 그 원동력은 지금까지 1년에 두 번 꼬박꼬박 벌어지는 경로잔치 때문이다. 이전에는 정월보름과 칠석에 마을에서 어르신들을 공경하자는 의미에서 전체 주민이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경로잔치를 벌여왔으며, 최근에는 복날을 맞아 음식과 함께 정을 나누는 경로잔치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경로잔치 기금은 출향인사들의 성금이나 동네주민들이 내놓는 기금으로 조성되는데, 회관에서 식사를 다 같이 나누고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마을 기금은 주민 누구나 회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항상 공개해 놓을 만큼 투명하게 관리해 모든 주민들이 서로 뜻을 모으며 화합하고 있다. 월계1리 주민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마을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주민간 우애가 깊고 화합이 잘 된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농사일도 팽개치고 일제가 요구하는 송진을 비롯한 많은 공출품목들을 대느라 애를 썼고, 주민들 중 몇몇은 천태리에 있던 탄광으로 일을 다니기도 하면서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껏 마을 주민들이 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벼농사이며, 담배와 고추 농사도 짓고 있다. 마을을 둘러보면 산자락을 활용해 낮은 지대에서 고추와 담배 농사를 짓는 풍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일부 농가에서 블루베리 등 특수작물을 재배하고 있기도 하다.
물 맑고 공기가 좋은 천혜의 환경 덕분에 월계1리 마을은 장수하는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기도 하다. 90세가 넘으신 어르신이 6분이나 계시고 나머지 주민들도 대다수가 80~90대로 고령이다.

마을회관과 정자.

◇해주오씨 집성촌 월계1리
현재 월계1리에는 41가구 83명이 살아가고 있다. 이중 월계1리 화양마을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성씨는 해주오씨(海州吳氏)다. 마을에 살고 있는 후손들에 의하면 월계1리에 가장 먼저 들어 온 입향조는 오일만(吳一萬, 1908~1990년대)이라고 한다. 오일만의 16대조인 오복남(吳福南)이 월계2리 명천에 입향한 후로 17세 후손인 오일만이 화양의 ‘두멍배미’에 땅이 있어 이곳으로 분파해 자리 잡으면서 현재까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 화양에 입향해 자리잡은 터는 화양목이라는 곳으로 그 후 후손들이 번창에 현재도 해주오씨가 마을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오일만이 입향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됐다고 하나, 조선후기 전국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총수’에 이미 화양동리가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오일만이 입향하기 전부터 화양마을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양의 입향조인 오일만의 묘는 현재 화양동 구룡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이 가장 번성했던 1960년대에는 해주오씨가 100호 넘게 살았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수가 크게 줄었다. 월계1리 마을은 해주오씨 13대가 자자손손 터를 잡고 300여년을 가까이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해주오씨는 매년 음력 10월 시향제를 지내고 있는데, 12대가 전부 모셔진 묘소가 월계2리 대치산에 있으며 비석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시향제는 이 묘에서 지내고 있으며 이후 최씨 등이 마을에 조금씩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성씨들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나 현재도 해주오씨 집성촌마을로 유지되고 있다.

생명사랑 행복마을 현판식 당시 기념촬영.

◇붕어바위의 전설◇월계1리 마을 역사
월계리는 백제 때 사시량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결성군 영현인 신량현에 속했다. 고려 초엽에는 여양현, 조선 초엽에는 홍주군에 속했다. 조선 말엽에는 홍주군 유곡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동, 시목리, 명천리, 월촌, 내동, 화양리와 마전리, 용연리 일부를 병합해 월촌과 명천의 뜻을 따 월계리라고 해 장곡면에 편입됐다.
현재 월계1리 한가운데로 홍성에서 청양으로 향하는 국도 29호선이 지나고 있다. 얼마 전 까지는 왕복 2차선 도로였으나 최근 공사를 진행 중으로 왕복 4차선 개통을 앞두고 있다. 도로의 확장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의 걱정과 근심은 깊어지고 있다. 특히 월계1리의 경우 마을과 논·밭이 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왕복 4차선이 되면 빠르게 달리는 차량이 증가될 것을 염려해서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과속 단속 카메라를 비롯해 100m 앞에서 인지할 수 있는 예비 신호등 등이 설치되길 바라고 있다. 특히 농촌마을 입구 주변은 농기계가 오가는 일도 잦은데, 빠르게 달리는 차량으로 인해 대형사고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월계1리 마을 곳곳에는 높지 않은 구릉같은 산이 분포돼 있다. 이 산자락 밑에 마을이 형성돼 있는데 국도와 경계하고 있는 마을회관이 위치한 곳이 행섭이 마을, 즉 화양마을이며 화양마을 뒤편으로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인 ‘진등날맹이’를 경계로 월촌과 우러내, 감나뭇골이 나란히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진등날맹이’는 등이 길다는 의미에서 ‘긴등’이라 불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며 ‘진등’이라는 명칭으로 변화된 것이다.
월계1리는 4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는데, 가장 큰 마을은 행섭이 마을로 주민들에게는 ‘월계1리’라는 지명보다 ‘행섭이’ 혹은 ‘화양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익숙하다. 장곡면 전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꼭대기 마을이기도 해 홍수피해도 없었을 뿐 아니라, 지대가 높아 사람이 넘기 어려워 왕래도 적었다. 이 때문에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모든 소식이 늦게 마을에 퍼져 독립만세운동도 할 수 없었던 마을이기도 했다.

월계1리에는 홍동면 대영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마을을 얼싸안고 있는 높이 170m의 삼봉산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 붕어를 닮았다는 붕어바위가 있다. 아주 옛날에 삼봉산의 산허리에 기운이 몹시 센 장수가 한명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장수는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나라를 세울 궁리를 하며 남쪽으로 점점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둠벙에서 낚시질하는 한 노인과 아낙을 보게 됐고, 장수는 수상쩍은 마음에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지만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아낙이 고기를 잡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아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인이 낚시대를 번쩍 들었는데 끝에 매달린 커다란 잉어가 장수의 얼굴로 날아갔다. 화가 난 장수는 허리에 있던 칼자루를 잡았으나 노인의 빛나는 광채에 기가 질렸고 범상한 노인이 아니라 판단해 예를 갖춰 올렸다. 장수는 새로이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소인을 도와달라고 말했으나 노인은 대답 대신 잡은 잉어를 구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늘과 땅의 조화를 보니, 이곳의 산세는 틀려먹었군! 하필 이곳에 자리를 잡아 무엇하리오, 이곳은 오직 나라의 난리를 피할 곳이로구나!”
그리고 구운 잉어를 아낙과 나눠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구름이 산마루를 넘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낙에게 말했다.
“너는 이제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라. 내사 이제 운명을 다한 몸, 나머지 생을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누비다가 그럭저럭 세상을 끝낼 것이니!”
노인은 이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아낙은 조용히 산을 향해 올라갔다. 장수는 노인의 말이 저 아낙을 아내로 맞으라는 뜻으로 여기고 더불어 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군사들이 쳐들어 왔고 장수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아낙도 장수 옆에 쓰러졌다. 그들이 목숨을 잃은 다음날 비가 몹시 내렸는데, 빗줄기는 무서운 천둥과 함께 성벽을 무너뜨리더니 산꼭대기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 놓았는데 그 바위의 형상이 붕어와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붕어바위는 난리가 날 때마다 본래 자리에서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난리 때 바위 근처에 모여들어 모두 난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목숨을 건져주는 산신바위 또는 산신할매 바위라고도 부르게 됐다고 한다.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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