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 황희정승의 음택지 靑龍出雲形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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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상 황희정승의 음택지 靑龍出雲形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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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8.1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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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사랑방

▲ 내포풍수지리연구회 이상운회장

황희(黃喜)1363(고려공민왕12년)~1457(조선문종2년)조선초기문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자헌대부 판강릉 대호부사 군서(君瑞)의 아들이며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89년(우왕2년)음보로 복안궁 녹사가 되었고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 1389년에는 문과에 각각 급제 하고 1390년(공양왕2년) 성균관학록에 제수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1394년(태조3년)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 학관으로 제수 되었다.
1426년 이조판서 우의정에 발탁 되었고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된 뒤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었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 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고 농사 개량에 유의하여 곡식 종자를 보급하고 각도에 명령하여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으며 경제육전을 펴냈으며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 되었다.

▲ 잘 정돈된 황희 정승 묘 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용과 흡사하다.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에 추증 되었고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 되고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영정이 봉안 되었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34호인 공의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1번지에 있으며 맥은 인방(寅方)에서 즉 동북간으로 들어오니 인입수(寅入首)가 되며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남서향을 하고 있으며 물은 왼쪽 동남방인 손방(巽方)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서쪽 경방(庚方)으로 나가므로 손득수(巽得水) 경파(庚破)가 되며 사대국지수구오행법(四大局之水口五行法)으로는 목국(木局)에 해당하며 십이운성(十二運星)으로 욕입수(浴入首) 욕좌(浴坐) 병득(病得) 태파(胎破)로 이법상 그리 잘 맞지 않은 듯한 자리 같으나 우감좌요(右減左繞)한 청룡이 돌아 안산을 삼았는데 안산이 가까우며 국세(局勢)로는 소국(小局)에 해당하며 혈장은 용이 꿈틀 거리며 내려 오는듯한 유혈(乳穴)로 맺었고 혈장과 순전(脣前)을 보면 그 끝이 넓고 안산을 보니 유순하고 가까이 있는 구름의 형상이므로 물형상(物形相) 청룡출운형국(靑龍出雲形局)에 속한다. 

▲ 잘막힌 수구와 정교한 조각의 묘 앞. 석물과 다른 묘지에서는 볼 수 없는 봉분 앞쪽이 용이 입을 벌린 것 같이 조성하여 놓았다.

사진에서 보듯이 공의 묘역의 특징 중 하나가 수구(水口)의 잘 막힘이다.
수구란 본래 물이 나가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수구는 물이 나가는지 들어오는지 모를 정도 이어야하며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옛 지가서(地家書)에서는 작은 배 한척이 들어올 정도로 좁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가히 이곳을 명당이 아니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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