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 위해 향우회·주민 힘 함께 모은 홍북 내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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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 위해 향우회·주민 힘 함께 모은 홍북 내동마을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7.01.26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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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46>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홍북면 대인리 내동마을
▲ 지난 9일 김석환 군수 방문 당시 내동마을 주민들의 기념촬영.

■대인리 내동마을 역사와 개관
대인리는 대동마을과 인후원 마을의 ‘대’와 ‘인’을 합해 ‘대인리’가 됐다. 본래 대인리는 홍주군 대감개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동, 산직리, 인후리와 매산리, 상리 각 일부를 병합해 대동과 인후의 이름을 따 대인리라 해 홍북면에 편입됐다. 현재 대인리는 4개 리로 나눠져 구성돼 있는데, 그중 내동은 대인3리의 마을을 지칭한다. 내동이라는 마을 지명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지명으로, 행정지명은 내동이지만 아직도 마을 주민들은 내동마을을 안골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하다.

내동은 마을 뒤편으로 우뚝 솟은 닭제산의 줄기인 중도리봉이 마을을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 때문인지 마을은 대인리 다른 어느 마을보다 아담하고 편안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예전부터 대인리에서 내동마을은 대농가가 많아 대인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편 중도리봉의 앞으로 왕소나무 수구맘이 조성됐으나, 야산개발로 현재는 밭으로 변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내동마을은 동쪽으로는 금마면과 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매산마을, 남쪽으로는 금마면 대교리와 북쪽으로는 신사마을과 접하고 있다. 또 내동마을은 다시 다섯 개의 작은 마을로 나뉘는데, 내동마을 앞으로 터 있는 대도로에서 마을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으로 너머뜰과 용량골이라는 마을로 나뉘고 왼편으로는 원굽이, 통안, 동산 마을로 나눠 칭하고 있다.

   
▲ 내동마을 입구 표지석
   
▲ 내동마을 풍경

■두리회 조직 활동·홍북 최초 여성이장
내동마을은 ‘두리회’라는 조직이 1년 전부터 조직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두레’의 의미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두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두리회는 마을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무궁화길 등 마을 발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단합과 화합을 위해서도 나서고 있다. 어르신들 간에도 단합이 잘 되는 것이 내동마을의 특징이다. 여러 행사를 연중 운영하는 동시에, 내동마을은 두 명씩 짝을 지어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해 회관에서 어르신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또 마을 주민 외에도 후손들이 와 식사 대접을 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조직적 운영을 통해 발전적인 사례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홍북면에서는 최초로 여성 이장인 조순천 이장이 지난해부터 마을 발전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조 이장은 남자들이 해야할 일은 지도자들과 반장들의 도움으로 무리 없이 해 나가고 있으며, 여성의 섬세함을 살려 주민이 필요로 하는 부분과 불편한 부분을 보살피고 이를 개선해나가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농촌마을들이 부녀회, 총회, 노인회 등의 조직만으로 구성돼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내동마을에는 향우회도 존재한다. 향우회는 내동이라는 고장에 뿌리를 둔 사람으로 지금은 외지에서 살고 있지만 내동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인근 마을과 함께 조직된 향우회원들은 정기적으로 회비를 걷고 마을 경로잔치와 마을행사를 주최하는 등 마을 화합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풍천임씨 집성촌 마을·안골사지 위치해
내동마을은 풍천임씨 집성촌으로 유명하다. 문헌을 통해서도 풍천임씨 후예 십여호가 세거했다는 사실이 확인 가능하다. 현재도 내동마을에 살고 있는 풍천임씨는 전체 인구의 50%에 해당할 정도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대인리 안골사지는 조선시대 사지로, 안골마을 남쪽에 있는 구릉의 북서향사면 하단부에 위치한다. 사지 앞쪽에는 금마천에 유입되는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하천 주변은 경작지로 개간돼 있는 상황이다. 또 사지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 밭으로 개간돼 경작되고 있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사지터에 민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철거돼 있는 상태다. 이미 전체 지역에 대해 개간과 같은 인위적 지형변경이 이뤄진 상태로 구체적인 사역은 알 수 없으나, 약 50여 평의 범위에 걸쳐 유물이 수습되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인데, 내동마을 북동쪽에 있는 표고 80m인 야산의 남동향사면 말단에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밭으로 개간돼 경작되고 있어 원래 지형이 변했고, 고인돌과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은 확인하기 어렵다. 고인돌 하부는 땅에 묻혀있어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지만, 지상에 뚜껑돌을 올려놓는 개석식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대략 길이 350cm, 너비 250cm, 두께 120cm 정도다.

▲ 내동마을회관 전경


■힘겨웠던 한국전쟁기와 가뭄 시기
내동마을 주민 중 몇몇은 3·1운동 당시 대인리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했던 기억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기 내동마을에서 유일하게 일본 오사카로 징용을 다녀온 임화순 씨가 마을에 거주했으나, 현재는 돌아가셨다. 내동마을의 한국전쟁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전해진다. 비행기가 나다니는 소리가 너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방안에 있기도 했다고 한다.

대인리에서 유일하게 참전용사인 분도 내동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임철순 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1월 소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가 7년이나 근무를 했다. 그는 대둔산 옆 중부전선 사방거리에서 격전을 벌였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내동마을 주민들이 겪은 가슴 아픈 과거이야기 중 또 다른 하나는 1965년의 가뭄이었다. 1965년 정부의 구호는 ‘일하는 해’였으나, 대인리의 샘물이 바짝 말라버려서 샘을 다시 파 농사에 썼는데도 금세 말라버릴 정도로 가뭄이 심했다고 한다.

군을 통해 발동기까지 지원을 받아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살리기 위해 고생했고, TBC방송국에서 안타까운 모습을 담아 9시 뉴스에 방송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유독 내동마을의 가뭄이 끔찍했던 이유는 수리안 전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만석꾼 임의원’ 임치강 씨 살던 마을
동산이라고 불리는 곳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만석꾼이 내동마을에 살았다. ‘만석꾼 임의원’이라고 동네사람들에 의해 불려진 임치강 씨는, 현재도 동산에 당시의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그 당시 어느정도 부자였는지 가늠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 임치강 씨의 집 옆으로 넓은 터에 임씨들의 묘가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마을에서 꽤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집안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임치강 씨는 내동마을 토박이로 ‘안골 임치강씨’라고 하면 홍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안골 거의 대부분의 땅이 모두 임치강 씨의 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자였다. 내동마을 사람들도 임치강 씨 덕택으로 땅을 부쳐먹고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 수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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