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신문 창간 10년, 홍성지역의 언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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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신문 창간 10년, 홍성지역의 언론을 말하다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7.06.1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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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목 당시 ‘홍주간행소’출판중심지 역할

1954년 ‘장항선기자연맹홍성군지부’ 결성

1965년 옥암리 ‘대전방송홍성중계소’ 세워

1980년대 ‘홍주소식’ 주민주도형으로 속간
1980년대 홍성읍 전경.

홍성은 충남서부지역의 중심지로 해방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방언론의 중심지였다. 특히 지금은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홍성과 예산에 조성되면서 충남의 행정기관이 이전해 옴에 따라 충청언론의 중심지가 됐다. 홍성은 조선시대 목사(牧使)가 주재하던 홍주목으로 관아지였고, 충서지방의 교통의 중심지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행정기관이 몰려 있어 정보산출의 근원지가 돼 왔던 곳이다. 홍주목 당시에는 관(官)에서 책을 인쇄해 내던 ‘홍주간행소(洪州刊行所)’가 설치돼 당시 출판의 중심지 역할을 맡아왔다.

따라서 홍성지역이 언론계에서 특기할 사항은 이 지방출신이 중앙언론계에 진출한 기자가 많았고, 각 신문사의 주재기자도 이 지역출신이 눈에 띄게 많았다는 점이다. 해방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홍성의 언론인들은 정치에 투신했다. 동아일보지국장이던 손재학은 초대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55년 동아일보지국장을 맡았던 유승준은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4·19의거 직전까지 두 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대표적 인물이다. 이처럼 해방이후 6·25한국전쟁 이후까지도 지방정치는 지역의 언론인과 언론계 종사자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불문율 같은 흐름이 지속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1954년 4월 홍성에는 ‘장항선기자연맹홍성군지부’가 결성됐고, 1957년에는 ‘홍성군기자단’이 조직됐다.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지역 언론계의 정화작업이 진행됐는데, 홍성지역에서는 단 한명도 정화대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언론풍토가 충남서부지역의 언론중심지 역할을 해내는데 밑거름이 됐다. 이후 지역에서 사이비기자를 색출해낸 언론정화작업이 끝나면서 ‘한국일보’가 처음으로 지방주재기자 채용시험을 실시했다.

 

■1963년 첫 홍성주재 한국일보 김양수 기자
1963년 한국일보에서는 일본(日本)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지방주재기자제도를 따라 전국 각 지역을 몇 개의 지구로 나눠 지구별 지방주재기자 시험을 치렀다. 충남에서도 서부지역중심지인 홍성이 주재지로 선정돼 홍성지구 한국일보 주재기자 채용시험이 실시됐다. 당시 홍성출신인 김양수(金亮洙·사진)가 한국일보 지방주재기자 1기생으로 선발돼 그해 4월 5일 한국일보사에 입사, 본사에서 수습교육을 마침으로써 홍성지역 최초의 주재기자로 발령을 받았다.

한국일보보다 2개월 늦은 6월에는 동아일보 홍성주재기자 시험을 현지에서 실시해 역시 홍성출신인 정상희(鄭祥熙)가 선발돼 수습교육 없이 발령과 동시에 근무하게 됐고, 2년을 근무하고 대전주재기자로 이동했다. 이들 두 명의 기자는 모두 홍성고출신이었다.

홍성에서의 첫 번째 필화사건은 동아일보 정상희 기자가 서천경찰서와 관련된 취재를 하는 동안 경찰에서 사선을 밝히려 들지 않자 검찰지청 직원을 사칭해 홍성경찰서에서 경비전화로 취재를 했다. 취재는 일단 성공했으나 기사가 보도되자 검찰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기자가 관명을 사칭했다고 구속해 버린 것이다. 이후 동아일보 본사에서 현지에 내려와 진상조사를 했고, 곧바로 석방됐으나 당시 신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분위기가 이 사건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셈이다.

이 무렵 지국장들도 주재기자들이 보도하는 기사로 인해 공박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지방언론은 지국장 중심으로 이끌려 왔기 때문에 독자들은 기자가 취재한 기사를 보도되지 않도록 해당 신문사 지국장에게 부탁하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기사의 보도와 지국장의 업무가 구분돼 있어 취재된 기사는 보도됐고 지국장만 난처한 입장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유로 지국장들은 기자들과 만날 수 있는 공동모임을 제의했고, 기자들도 이에 호응해 친목도모를 위한 ‘홍성신문인협회’ 단체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홍성지역 언론형성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65년 홍성읍 옥암리에 대전방송홍성중계소가 세워진 것이다. 이후 대전문화방송국에서도 홍성에 주재기자를 두기로 했고, 당시엔 한국일보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일보 주재기자인 김양수가 주제기자를 맡아 활동했다.


 

홍주소식지 표지. 1987년 5월호로 속간됐다.

■지역언론 ‘홍주소식’ 주민 주도형으로 속간
이후 1980년대 홍성의 지역언론은 활기를 잃고 암흑기에 접어든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12·12사태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지역언론도 혼란기 들면서 도청소재지를 제외한 지방주재기자는 주재지에서 철수토록 조치돼 홍성주재기자들도 5·18 이후 도청이 있는 대전으로 이동했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주재기자는 없어졌고 각 도청소재지에는 지방지와 지방방송국, 연합통신 기자만이 남게 됨으로써 5공화국 기간에 걸쳐 지방언론은 활기를 잃게 된다. 홍성지역에서도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도별(道別)로 1사(社)만 남게돼 대전일보 주재기자와 통신사 통폐합에 따라 연합통신 기자 1명, KBS주재기자 1명 등 3명이 홍성에 주재했다. 이즈음 5공화국의 독재에 항거하는 국민들의 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지역마다 언론활성화의 열망이 커져가는 가운데, KBS의 정권수호적 편파방송에 항거하는 시청료거부운동이 확산되면서 홍성지역에서도 자구적인 언론활동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때마침 홍성에서도 홍성문화원 원장이 황규철(黃圭喆)로 바뀌면서 군정홍보지 성격으로 발간돼 오던 ‘홍주소식(洪州消息)’지를 주민 주도형으로 속간시켜 보자는 뜻이 모아져 당시 편집위원으로 ‘홍주문학회(洪州文學會)’ 회원이던 김양수, 정재범, 구재기, 이번영 등이 모여 1987년 5월호부터 속간을 실현시켰다. 이는 정부당국의 언론탄압에 맞서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지역언론의 활성화를 꾀한 시도로 지역언론사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홍주소식의 편집도 일단은 향토사와 문화성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하면서 지역의 토막소식을 통해 주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수용하면서 조심스럽게 비판으로 출발했다는데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엔 6·29선언이 있기 전이었으므로 행정당국은 ‘홍주소식’의 몇몇 기사에 대해서는 불만이 표출됐고, 마찰도 빚었으나 홍성지역의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는데 힘입어 중립적인 주민들의 기고를 통해 편집하는 노력을 지속시켜 나갔다. 이후 지방언론의 활성화에 밑거름이 되도록 지역언론 매체의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제6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5공화국의 언론통폐합조처에 대한 국회청문회로 낱낱이 규명되면서 언론자유화의 물꼬가 터진다. 전 국민들의 성금으로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계기로 언론의 활성화가 이뤄지면서 폐간됐던 중앙일간지의 속간과 함께 신문창간이 중을 이었고, 지방지도 다시 복간하는 등의 영향에 힘입어 시·군단위의 지역언론 창간의 시발점이 됐다.

이때 홍성에서도 당시 한겨레신문의 모델을 벤치마킹해 군민주를 모아 ‘주간홍성’이 창간하기에 이른다. 지역주민들이 주주로 참여한 ‘군민의신문’인 ‘주간홍성’의 창간에는 당시 고광성치과 원장이었던 고광성과 ‘홍동소식’의 발행을 주도했던 이번영이 참여해 지역언론의 초석을 놓게 된다. ‘주간홍성’은 1988년 12월 1일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홍동소식’의 맥을 이으며 전국 시·군단위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의 효시가 되는 역할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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