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무공훈장의 뒷면은 어둠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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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무공훈장의 뒷면은 어둠을 품었다
  • 이국환 기자
  • 승인 2017.06.2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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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창식 씨
무공훈장을 목에 건 김창식 씨.

6월은 참으로 숙연해지는 달이다. 6월 25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그렇다. 6·25한국전쟁 발발 이후, 스물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가족의 품을 떠나야했던 한 젊은 청년. 그 청년이 어느새 아흔이라는 나이를 맞이했다. 현재 광천읍에 머물고 있으며, 6·25참전용사이자 무공수훈자회 지도위원인 김창식(90) 씨가 바로 그다.

“인민군은 어땠습니까.” 기자가 김창식씨에게 가장 먼저 했던 질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창식 씨는 인민군을 본 적이 거의 없다고 답했다. 눈에 보이는 적은 죄다 중공군이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김창식 씨에게 있어 ‘공포’라는 단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아군이 한 명일 때 중공군은 삼십여 명 정도였다”며 당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중공군에 대한 공포와 “한 번 전진하면 두 번 후퇴해야했다”던 그때의 상황을 밝혔다.

6·25전쟁을 치루며 김창식 씨가 가장 마음 아파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전우와 친구들의 죽음. 김 씨는 “읍에서 같이 징집된 친구들이 같은 부대에 배치되는 경우가 허다했고, 함께 일선에 투입되는 경우도 잦았다”며 당시 징집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부대에서 만난 전우들, 그리고 전우이기 전에 친구였던 이들의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정말 괴로웠다”며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김창식 씨는 6·25한국전쟁의 상황을 가리켜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소총수부터 포대까지 여러 병과를 거쳐 다양한 상황을 겪었던 김씨는 “당시 포탄이 떨어지면 같이 지내던 전우들이 하루아침에 사리지기 일쑤”였고, “산더미처럼 쌓인 중공군 시체 위에 포진지를 세워 전투에 임하는 일도 예사”였다며 당시 처참한 전쟁터의 양상을 신랄하게 묘사했다.

김창식 씨는 6·25한국전쟁을 치루며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만큼 많은 일을 겪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집합 때문에 잠시 이동하는 사이 야영지에 포탄이 떨어져 아군이 전멸한 일이나, 혹은 포탄 파편이 튀어 치아 네 개가 사라진 경험이며 그는 “늘어놓자면 하루를 다 잡아야 할 만큼 많은 고비를 겪었다”고 밝혔다.

김창식 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가정 먼저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는 말을 꺼냈다. 김 씨는 징집 이후 제주도에서 훈련받고 11사단에 배치돼 치열한 전쟁의 최전선에서 5년간 싸웠다. 그 치열한 전쟁의 일선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 김 씨는 빛나는 무공훈장 뒷면에 함께한 전우들의 피와 혼이 서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창식 씨는 오는 6·25한국전쟁 67년째를 맞이해 “지금의 대한민국은 너무 혼란하다”며 “아무래도 전쟁의 아픔을 잘 모르는 세대들 많아지다 보니 전쟁에 대한 인식도 상대적으로 부족해진 것 같다”면서 “우리 국민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늘 대비하는 자세를 지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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