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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하니 장수의 복도 누려요”병원과 담 쌓고 지내는 98세 장소성 할머니 삶
홍주제일교회 정진원 목사와 함께 하트 모양을 그려 보이며 건강을 과시하는 장소성 할머니.

나이 열일곱에 결혼, 스물세 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홀로 자식 셋을 부양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언 100년, 장소성 할머니(98)의 얼굴에는 나이만큼 주름살이 늘어났어도 그늘 하나 없이 밝고 환하다. 장 할머니는 홍북읍 내덕리 어경마을 들판 가운데 있는 농가를 혼자 지키며 사는데 너무나 건강하고 기억력도 좋아 인터뷰에 쾌히 응하면서 한 많은 지난 세월을 어제 일처럼 기억해냈다.

“50대 중반에 딸 때문에 예수를 믿고 나서 늘 감사하며 삽니다.”
장수에 대한 비결을 묻자 할머니는 인생의 후반 뒤늦은 나이에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늘 감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지금도 할머니는 매일 성경을 읽고 TV도 기독교 채널만 즐겨본다고 했다. 그 밖에 즐기는 취미가 있다면 그림 그리기다. 유치원 아이들처럼 꽃이나 사물의 테두리 선만 있는 도화지에 색채를 입혀 완성하는 것인데 할머니는 요즘 어떤 형상의 윤곽이든 색을 칠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일요일에는 예배드리러 교회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다. 아픈 곳이 없으니 병원에 갈 일도 없다. 가끔은 손자나 딸이 찾아와 함께 나들이나 외식을 하러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할머니의 젊은 날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할머니는 당진시 행정리가 고향으로 당시 친정은 자녀들을 모두 교육시킬 정도로 일찍 개화를 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딸에게도 공부를 시키려고 했지만 장 할머니는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다. 나중에는 후회하게 됐다는 할머니, 그래도 부모님은 예산군 삽교에서 가장 명문집안을 골라 사돈을 맺기 위해 일찍 딸을 시집보냈다.
“내가 열일곱, 신랑은 열여덟이었어요, 어른들이 집안만 보고 결혼시켰는데 막상 가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열일곱 살 새댁은 시부모뿐만 아니라 당숙들까지 모시고 사는 대종가집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큰 아버지 중 한 분은 술과 노름을 즐겨 가산을 탕진하기까지 했다. 남편은 홍성공립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에 가서 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24세 때 일본군에 입대했다. 집안에서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10년간 군대생활하면 돈을 좀 벌어 올 수 있다며 등을 떠밀어 보냈으나 그 후 남편은 영영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군대에 굳이 안 가도 잘 살 수 있었는데 어른들이 왜 부추겼는지….”
그 때를 회고하는 할머니의 눈가가 어느새 젖었다. 그 후 할머니는 아들 둘, 딸 하나, 세 자녀를 혼자서 길렀다. 큰아버지 때문에 풍비박산 된 집안은 시아버지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할머니는 해방 후 삽교면 목리에서 두 섬지기(40마지기)의 농사를 지으며 세 자녀들을 모두 공부시켰으나 기대를 걸었던 두 아들이 일찍 죽었다.

“큰아들은 연세대학교에 보냈는데 1년에 쌀 40짝(가마니)씩 등록금과 하숙비로 대줬어요. 졸업하고 선생을 하다가 8년만에 아이 셋 남기고 죽었지….”
할머니는 큰아들이 남긴 손주들을 맡아 공부를 시켰다. 다행히 모두들 바르게 자랐다. 할머니는 정부로부터 노령연금과 기초생활 지원금을 합해 매월 40만 원을 받는다.

같은 동네에 있는 홍주제일교회 정진원 목사는 장 할머니가 매주 나와서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장 권사님은 우리 교회 심방전도사님과 같습니다. 주일예배에 누가 안 나왔는지 다 아시고 ‘오늘은 아무개 집사가 안 보여’ 하며 항상 안타까워하십니다.”
할머니는 설교로 은혜를 많이 끼칠 뿐만 아니라 마당에 쌓인 눈도 쓸어주신다며 정 목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다정한 모자 사이 같았다.

허성수 기자  sungshu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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