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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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23>
  • 한지윤
  • 승인 2018.04.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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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이어낸 듯한 창고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소용없는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 놓고 있었다. 한 박사는 이런 점에서 무관심한 편이다. 현관의 미닫이로 된 문을 밀어보았으나 고장난 문인지 열리지가 않았다. 한 박사는 힘껏 밀어서 겨우 열었다.
“인천에서 온 이순실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의 목소리에 안쪽에서,
“네, 나가요.”

힘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한 박사는 목소리의 매력이란 그 음정이나 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긴장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조금 있다 안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의 손질도 제대로 하지 않은 전 여사가 남자가 입는 듯한 허름한 옷을 걸치고 나타났다.
“미안해요. 감기가 들어서 누워 있었는데.”
전 여사는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히죽이 웃었다.

“혹시 실례가‥‥‥ 쉬고 계시는데 이렇게 방해를 해서. 열이 있으신가요?”
“아니예요. 열은 좀 내렸습니다만, 아직 몸이 쑤시고 기운이 없어서요.”
“올 감기는 오래 간다고 합니다. 몸조심 하셔야지요. 일이 있어서 들린 것이 아니고 잠시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한국일 박사가 인사하고 가자고 해서 들렸습니다. 이건 과자인데‥‥‥”
“매번 고맙습니다.”
“유우조 씨도 별일 없으신가요?”
“네. 일하러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안부 전해 주십시오.”

한 박사는 멋 적게 웃고만 있었다. 그의 웃음은 예의 상투적으로 한 것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박사는 무심결에 현관 옆에 놓인 쟁반 위의 작은 주전자와 2개의 찻잔에 눈길이 갔다. 어제인가 아니면 오늘 아침에 누군가가 차를 마시고 간 것이 틀림이 없다. 찻잔을 그대로 방치해 둔 것은 그래도 좋은데 그 찻잔의 안쪽에 때가 낀게 신경이 쓰였다. 단지 두어 번이라도 수세미로 닦으면 깨끗해질 텐데 그대로 둔 채로 있는 전 여사의 정신의 빈곤을 본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 여사는 언제나 그랬다. 한 박사에게나 양어머니인 이 여사에게 좀 올라오라는 말을 한 적도 별로 없었다. 한 박사는 이건 퍽 편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관에서 일을 끝낼 수가 있으니 둘러 볼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한편 생각해 보면 아무리 구질구질한 집이라지만 올라오라는 것이 예의일 것이고 또 정의 표시도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전 여사는 어딘가 이상한 여자다. 좀 더 확실히 말한다면 가지고 온 선물을 사양하는 법 없이 받지만 빨리 돌아가 달라는 태도다. 한 박사는 이런 현실을 비교적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지금 만일 전 여사가 생모다, 하는 태도로 나온다면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여자가 자기의 어머니라고 주장하고 나선다고 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태도로 감정의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양어머니인 이 여사가 대가집 마나님같은 단정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은 그녀의 몸에 배인 교양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원인은 전 여사의 거친 생활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존경함으로써 상대에게 맹목적으로도 되는 것이나 상대에 대한 모멸적인 행동일 때에도 관대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 뜻에서 이 두 여자는 궁합이 맞는다고도 할 수가 있다. 양어머니와 한 박사는 그리고 딸 유리는 전 여사의 집에서 5분도 못되어 나오고 말았다. 5분도 할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은 서로가 대화의 차원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관을 나올 때 세 사람의 어른은 각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전 여사는 손님이 빨리 돌아가 주어서 고마웠고, 한 박사도 마칠 것을 다 마쳤으니 지금부터 온양에 가서 온천에라도 들어가 푹 쉴 수가 있으니 해방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호텔은 가끔 가는 곳이다. 특별히 부탁을 하지 않아도 한 박사의 취향에 맞는, 붙어 있는 두 개의 방을 잡아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호텔은 신관과 구관이 있어 구관은 좀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욕실도 크고 침실 앞에는 조그마한 룸같은 것도 곁들여 있어 느긋한 기분을 만끽할 수가 있었다. 한 박사는 목욕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나 어머니와 딸 유리는 가족탕에 들어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 박사는 이렇게 한가하게 쉬는 날에는 딱딱하지 않은 독서를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독서라 해도 외국의 추리소설이 아니면 무협소설들을 누워서 읽는 것이었다. 이안 프레밍의 007씨리즈 같은 것은 영화가 히트하기 전에 거의 다 읽었을 정도다. 또한 영화소설 ‘사랑과 영혼’은 참으로 감동깊게 읽었으며 한 박사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인 만큼 에리카종의 ‘여자에겐 블랙보다 화이트가 더 아름답다’라는 책은 두 권짜리를 세네 번씩 읽었을 정도이다.

어머니와 딸 유리는 한 방을 쓰면서 조모와 손녀가 다정스레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TV를 본다. 유리는 조모와 나란히 한 침대를 쓰고 있다. 한 박사는 연속된 방 하나를 혼자 투숙해, 가지고 온 파자마를 갈아입기가 바쁘게 가방 속에 넣고 온 스카치위스키를 조금씩 마셔가면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저녁 여덟시가 조금 지났을 때다. 한박사의 베갯머리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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