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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전통 근간한 남당 한원진의 신념과 의리홍주의 유학<4>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
  • 승인 2018.07.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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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한원진 사당. 원 안은 남당 한원진.

춘추대의를 성리학 차원에서 체계화 한 것이 남당학
한원진의 인물성론 철저히 현실적 요구 반영한 학문
시대를 구제하는 철학과 보편적 가치 상승 위해 노력


■ 남당학의 근본 문제
지난 10일 ‘홍주향교 유교아카데미’에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최영성(崔英成) 교수가 ‘남당학의 근본 문제와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내용은 남당학(南塘學)의 근본 문제에 대해 거시적 차원에서 짚은 것이다. 근본 문제란 다름 아닌 ‘철학의 목적성’에 관련된 것이다. 최 교수는 남당학의 뚜렷한 가치 지향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춘추대의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을 주로 말했다. 조선 후기 사실상 국시(國是)가 되어버린 춘추대의를 성리학 차원에서 체계화한 것이 남당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남당학파의 계승 양상을 고찰했다.

남당학파는 한원진 이후 학문적, 사상적으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한원진이라는 거목의 그늘에 가려지고, 남당학의 촘촘한 그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학파의 후예들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다가 실각한 이후, 학파의 존립 기반이 무너져갔다. 근세에 한원진의 사숙문인(私淑門人)을 표방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대개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내포(內浦) 지역에 국한됐다. 남당학의 전승 문제, 계승 양상에 대한 연구가 드믄 현실에서 이에 대해 고찰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한원진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진 편이다. 일반 논문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고, 박사학위논문과 단행본 숫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연구 주제를 보면 지난날 인물성론(人物性論)이 대다수를 이루어오던 것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미발심체(未發心體)의 문제, 지각론(知覺論) 등으로 다양한 논의가 이어졌다. 한원진이 워낙 인물성론의 부면에서 유명하다보니 연구가 성론에 집중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논의가 ‘순수철학’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까닭에 일반인들이 알기 어렵고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한원진과 이간(李柬) 사이의 인물성논변은 그 범위가 넓었다. 개념상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했지만 논변 과정에서 동원된 논리는 피차 갈수록 세련되었다. 겉만 보면 ‘순수철학의 발로’라고 여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철학은 현실의 반영이다. 남당철학에는 목적성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다. 저간의 연구 경향을 보면, 철학 전공자들은 대체로 인물성론의 철학적 탐구에 집중하였다.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당시의 사회 현실과 어떤 유기적인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역사학 전공자들은 호론과 낙론이 북벌론(北伐論)과 북학론(北學論) 같은 뜨거운 문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큰 관심을 보였지만, 그것의 철학적 기반은 소홀하게 다룬 감이 없지 않다. 양쪽이 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학제간의 통섭’이란 이런 것이라고 본다.

■ 남당 한원진의 인물성론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성리학으로 체계화한 학자’라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은 철저하게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현실적 요구란 바로 18세기 시대정신이었던 춘추대의를 성리학 차원에서 체계화하는 것이며, 그 기초는 ‘인수대별(人獸大別)’의 논리를 확고하게 수립하는 것이었다. 한원진의 인물성론을 순수철학적 관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반은 얻고 반은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한원진은 일생토록 송시열이 유·무언으로 유촉한 두 가지 일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하나는 주자학의 절대적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춘추대의를 성리학으로 이론화, 체계화하는 일이었다. 주자절대주의의 신념으로 이루어 낸 것이 ‘주자언론동이고’라면, 인수대별로 수렴되는 춘추대의를 성리학 차원에서 체계화해 정립한 것이 인물성이론이요, 성범심부동론 등이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송시열과 한원진은 ‘우당(尤塘)’으로 병칭될 만하다. 다만 송시열에게는 ‘직(直)’사상과 같은 강력한 행동철학은 있었으나, 학술적 차원의 이론 정립이 미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비해 한원진의 경우는 이론 구상과 논리 개발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행동철학의 측면에서는 송시열에게 한 발 양보해야 한다. 이런 점은 상호 보완적 성격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원진은 송시열 못지않은 강의준절(剛毅峻截)한 기질을 타고났다. 게다가 학문에 대한 확집(確執)이 대단했다. 그는 율곡-우암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계승했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강렬했다. ‘분변’을 위주로 하는 그의 학문 성격은 국가적 지표나 정치 노선을 확립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내세운 기치(旗幟)가 선명했다. 그러나 포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원진과 그 후예들의 배타적 성격은 학술 활동과 정치 활동에서 외골수로 나가면서 적지 않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고집’, ‘독선’에서 나아가 ‘편벽’으로 비쳐지기에 이르렀다.

일차적으로 도통과 관련해 김장생 가문이 등을 돌렸다. 이어 송시열·송준길의 문묘 배향 당시 위차(位次) 문제로 촉발된 우춘시비(尤春是非: 春尤是非)의 휴유증 때문에 송준길의 후손 송명흠(宋明欽)&#8901;송문흠(宋文欽)이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로 나아갔고, 권상하의 증손으로 한원진의 문인이었던 권진응(權震應) 역시 낙론으로 돌아섰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원진에게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던 윤봉구(尹鳳九)와도 학술 토론 과정에서 틈이 벌어짐으로써 남당학 내지 호론의 앞날을 어둡게 했다. 남당학파의 강력한 세력 기반이었던 송시열 후손들 역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호비락(非湖非洛)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쯤 되면 ‘사면수풍(四面受風)’의 형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한원진의 문인 가운데 영조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집안사람인 김한록(金漢祿)은 산림이자 왕실의 척족(戚族)임을 배경 삼아 세력을 규합했다. 노론 벽파를 배후 조종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했다. 김한록 일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깊숙이 개입했고, 세손인 정조의 즉위를 막는데 앞장섰다. 정조 즉위 이후에도 호론 계열은 정조를 시해하려 했고, 이 일 때문에 정치적으로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호론은 점차 그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학파가 이렇게 몰락한 데에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독선적 태도에서 오는 편협성·배타성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호락논쟁은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런 등장이면서도, 관점을 달리해 보면 ‘시대성의 산물’이다. 호론과 낙론은 다 같이 춘추대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인물성에 대한 관점과 시각은 서로 달랐다. 호론은 특수성(차별성)에 집착했고 ‘주체와 타자’의 구분에 역점을 뒀다. 이에 비해 낙론은 시대 인식에 공감은 하면서도 보편성의 측면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또 ‘성선(性善)’이라는 유학의 대명제를 지키려 했다. 논리적 일관성의 면에서는 낙론을 평가할 만하다. 호론은 ‘심’과 ‘성’에 대한 문제를 놓고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한원진이 허령한 심의 본체를 기질과 겸해 논하는 것은 이전에 보기 어려운 논리다. 이에 대해 ‘조선주자학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 자체가 이미 호론의 학설이 시대성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년간에 걸친 논쟁 결과, 일단 한원진 계열의 호론이 정통성을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우선 명분상으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춘추대의’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낙론이 호론을 압도하기 어려웠다. 낙론의 난점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한원진의 후예들은 한원진이 제기한 학설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특수성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설(師說)을 고수, 방어하고 도통을 자부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논리 개발과 이론 보완이 없다보니 학술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재야산림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현실을 감당하는 데 한계와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는 가운데 정치 운영은 물론 학계·사상계의 주도권이 낙론으로 옮겨갔다.

정치 주도층인 낙론은 내면적으로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현실적 변화를 모색해 나갔다. 마침내 낙론 내부에서 신진기예(新進氣銳)를 중심으로 ‘북벌에서 북학으로’의 논리가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 할 만하다. 이에 비해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대의명분만 고집했던 호론은 갈수록 사상계의 변화를 가로막는 저지력으로 인식됐다. 고립의 길이 부른 학파의 종말이 예견됐다. 시대의 흐름을 거부한 채 이론 보완과 논리 개발에 소홀한 결과다.

근세에 한원진의 정신적 후예를 표방하는 학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내포(內浦) 지역에 근거지를 뒀으며, 왕조가 기울어가는 시점에 서산낙조(西山落照)의 장엄함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어떤 학문이나 학파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침과 명멸(明滅)이 있기 마련이다. 한계나 폐단 없는 학문이란 없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 전통을 근간으로 하는 도덕문명을 야만으로부터 지켜내려 했던 한원진의 신념과 의리, 책임의식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시대의 요구를 잘 파악해 춘추대의와 인물성론으로 철학의 뼈대를 삼고, 나아가 이를 ‘시대를 구제하는 철학’, ‘보편적 가치’로 끌어 올리려고 일생토록 노력한 점 역시 평가 받아야 될 것이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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