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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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36>
  • 한지윤
  • 승인 2018.07.2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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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출산 후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겠군요.”
“집에 아무 준비도 없어요.”
그녀는 세상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갓난아기 것은 퇴원할 때면 돼요. 우리 병원에서는 입원중인 신생아에게는 병원에서 준비해둔 아기 옷을 입히기로 되어 있으니까, 단지 아주머니의 쓸 물건만 나중에라도 좋으니 딸더러 가지고 오라고 해요. 경기도라면 그다지 먼 곳이 아니니.”

한 박사는 가능한 담담하게 말했으나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 박사는 성격적으로 이 세상 일을 모두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않으면 상당히 복잡한 일도 의외로 간단하게 처리되는 수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간단하게 생각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딸 아이에게 전화할 수가 없는데요.”
하고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 소식도 없이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녜요? 아주머니가 자주 외박을 해서 딸이 예사로 여기고 있다면 별 문제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고라도 생겼나, 유괴라도 당했나 싶어 경찰에라도 알리면……”
“그렇지만 제가 아이를 낳는다는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잖아요.”
한 박사는 볼펜의 뒤끝으로 차트를 두서너 번 두드리면서 말했다.

“난 아주머니의 생활에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무언가 도와줄 수는 없어요? 이럴 때 말입니다.”
“없어요.”
한 박사는 처녀잉태도 아닐꺼고…… 라고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죽었나요?”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제가 근무하던 회사의 합숙소에 회사의 용무로 4,5일 묵고 간 사람이니……”
“그럼, 좋습니다. 아이 아빠 같은 건 문제가 아니니. 그보단 딸에게 전화를 해 둬야 합니다. 걱정할 테니까. 그리고 간호사가 2층의 입원실로 안내해서 잠옷이랑 필요한 것을 드릴 테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아주머니, 가요!”

한 박사는 나 간호사의 이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 간호사가 남아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수석간호사도 야근이라서 몇 시간 뒤 해산이 된다고 해도 별 문제없이 진행되리라고 생각했다.
한 박사는 식당으로 갔다.
유리는 TV를 보고 있었고 아내는 혼자서 식탁에 앉아 있었다.
“급한 산모가 있어서.”
한 박사는 그렇게 말했으나 웬 일인지 그 이상의 설명은 아내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의 비프스테이크가 식었잖아요.”
아내는 투덜댔다.
“한 번 더 구워서 줄 수 없소? 난 잘 익은 것이 좋아.”
“어머, 당신, 전에는 조금 설익은 것을 좋아 하지 않았어요?”
“요즘은 잘 익은 것이 좋아졌어.”
한 박사는 그저 뜻 없이 한 말이었다. 아내는 한 박사를 흘깃 쳐다보고는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집은 가난해요.”
부엌의 가스레인지 앞에서 아내가 말했다.
“그래애……”
한 박사는 아무렇지 않게 되는대로 대답했다. 가난의 요소가 없는 집이 이 세상에 있을까? 버킹검 궁전에서 살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가도 남의 눈에 띄이고, 의회의 간섭을 받아가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위대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가난한 것이다. 일개 의사에 불과한 한 박사의 집에 가난의 요소가 없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어째서 우리 집이 특히 가난하다고 생각이 되지?”
“식사도 한 자리에 모여서 할 수가 없잖아요.”
“먹을 때도 있잖아.”

“외국 사람들은 아무리 서민이라도 식사쯤은 즐겁게 하고 있어요.”
“그런가? 미국 사람들은 그런 것만도 아닌 듯 하던데. 샌드위치를 서서 먹는 사람이 많잖아?”
“당신은 항상 바빠서, 바빠서 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일을 더 중요시해요.”
 ‘이것 봐라’ 하고 한 박사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윤미라는 여자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여자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지금 저 여자의 말은 오히려 사람을 꿰뚫어 보고 있지 않은가.
“글쎄, 그럴까?”
한 박사는 싱겁게 웃었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나 실은 그렇지도 않아.”

그건 한 박사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내가 좀 더 여자답다면 한 박사는 ‘맞아, 남자들이란 가정보다 직장이 더 중요해’라고 했을지 모른다.
“박연옥 여사가 전화해 왔어요. 이 번에는 친구들과 브라질에 간대요.”
“언제?”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한 박사는 아내가 다시 데워온 비프스테이크를 다 먹을 때쯤에 전화벨이 또 울렸다.
수석간호사 민선경 이었다.
“선생님, 입원한 이영신환자 지금 분만실에 입원시켰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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