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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 호서지역의 화서학파홍주의 유학<7>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민영 책임연구위원
  • 승인 2018.08.1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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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양평 뿌리인 화서학파 충청도 이식돼 독립운동 주도
이항로 학문, 사승 없이 독력으로 평지에서 굴기한 독학자
화서학파 대표 유학자들 호서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형성해


■ 화서학파의 형성
화서 이항로를 비조로 하는 화서학파는 그 뿌리를 경기도 양평에 두고 있었다. 양평과 춘천, 가평에 걸쳐 있던 화서학파는 그 뒤 문파가 세력을 확장해감에 따라 황해도 평산과 평안도 태천을 중심으로 하는 양서지방, 그리고 충주, 제천, 원주 일대에 걸친 중부지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화서학파는 또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최익현과 유진하, 윤석봉 등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충청도 내포지방에도 이식돼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화서학파의 비조 이항로(李恒老)는 1792년 경기도 양근현 벽계(蘗溪, 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이었으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이항로의 학문은 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정립된 것이었다. 원래 이항로는 뚜렷한 사승(師承) 관계없이 ‘독력으로 평지에서 굴기한 독학자’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버지 이회장과 이우신(李友信) 임로(任魯) 정도가 학문 수학기의 이항로에게 일정한 영향을 준 학자들로 지목되는 정도다.

포천 출신의 김평묵은 1842년 2월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왔다. 그는 이 무렵 홍직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기도 했다. 후술하듯이 이항로 사후 그 적전(嫡傳)을 계승해 문파의 수장에 오른 김평묵은 유중교와 더불어 화서학파를 이끌어간 양대 축이 되었던 인물이다.

1843년에는 평북 태천의 박문일(朴文一)이 벽계로 내려와 이항로 밑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후술하겠지만 그 뒤 박문일은 태천으로 돌아가 그의 아우 박문오(朴文五)와 함께 문인들을 양성함으로써 관서지역 화서학파의 일문을 이루었다.

1846년 이항로의 나이 55세 때에는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13세의 나이로 벽계로 찾아와 수학을 청하였다. 이항로는 총명한 어린 최익현을 특별히 사랑해 ‘낙경민직(洛敬閔直)’이라는 네 글자를 내려주면서 학문을 독려했다. 또한 이듬해 12월에는 그에게 면암(勉菴)이란 호를 내려줬다. 이후 최익현은 1855년 출사 때까지 벽계를 출입하며 학문에 매진하게 된다. 이항로 문하에 입문할 즈음 최익현은 후곡(厚谷, 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호서지역의 화서학파
호서지역의 화서학파는 최익현을 비롯해 유진하(兪鎭河)·윤석봉(尹錫鳳) 등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호서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됐다. 최익현이 충청도 정산(현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이주한 것은 그가 68세 되던 1900년의 일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오적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해 12월에는 노성의 궐리사(闕里祀)에서 유림을 모아 강회를 열고 함께 항일의 맹세를 다졌다. 1906년 4월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8월 대마도에 유폐된 그는 그해 1906년 12월 말 유배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최익현은 정산에 거주한 6년간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보령의 백관형·유준근 청양의 이식·안항식, 공주의 윤긍주·최재창·이상두, 아산의 곽한일, 연기의 곽한소, 대전의 최제태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에는 곽한일과 이식·백관형·이교헌·곽한소 등 정산에서 직접 사사를 받은 이도 있으며, 유준근과 같이 대마도 유배 중에 사사를 받은 이도 있다. 또한 이식·곽한일·이교헌·송병직 등과 같이 홍주의병에 참여한 이도 있으며, 윤긍주·최은상·최영복 처럼 태인의병에 참여한 이도 있다. 백관형·유준근 등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겪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연기지역에 정착한 문인으로 곽한소(1882-1927)가 있다. 그는 최익현이 정산에 이주한 직후인 1900년 3월에 정산으로 들어가 수학했다. 그는 스승을 수행해 남도 여행을 하면서 ‘사우록(師友錄)’을 남겼으며, 1906년 태인의병에도 동참했다. 최익현 사후에는 1907년 7월 고석진·윤항식·양재해 등과 함께 문집간행소를 설치하고 간행통문을 발송해 문집을 간행케 하는 등 ‘면암집’ 제작에 진력했다. 현 세종시의 고정리, 발산리 등지에서 살았다.
유진하(兪鎭河, 1846-1906)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에서 태어나 1871년 유중교(柳重敎)를 가평의 한포서사(漢浦書社)로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화서학파에 입문하였다. 그는 뒷날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로 이사했다.

유진하는 이후 서산의 금병산에 은거하다가 1899년 서산시 운산면 거성리 추계(秋溪) 마을로 이사해 후진을 양성햇다. 말년인 1906년에는 당진의 대호지면에 의령남씨들이 설립한 도호의숙(桃湖義塾)에 초빙돼 강의를 했다.

윤석봉(尹錫鳳, 1842-1910)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이항로의 문인이다. 1888년 서천군 비인면 율리로 이거했고, 몇 년 뒤에는 남포군 신안면 한천리의 화정(花汀)으로 이주했다. 그가 남포로 이주한 후 주자의 영당인 집성당(集成堂)을 건립해 춘추로 제향을 올리면서 향풍을 진작시키고 후학을 양성했다. 1896년 유인석이 거의하자 보령의 무과 출신인 황재현(黃載顯)을 천거하는 등 제천의병에 참여햇으며 뒤에 유인석을 좇아 서간도로 건너가 활동햇다. 그는 1906년 5월 민종식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한 직후 이식·김상덕 등과 함께 홍주성에 들어가 홍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노정섭(盧正燮, 1849-1902)은 경기도 개풍군 풍덕 출신이다. 9세 때 광주군 연곡(蓮谷)으로 이주했다. 23세 되던 1871년부터 가평으로 가서 김평묵과 유중교를 사사했다. 그가 목천에 은거한 것은 1889년 무렵이다. 원래 속리산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동학이 치성하다는 말을 듣고 목천과 진천 사이에 옮겨 살면서 강학과 저술에 전념햇다. 문인으로는 김기호 등이 있다.

윤긍주(尹兢周, 1853-1912)는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연여(淵如), 호는 고당(顧堂). 아버지는 진사 윤인보(尹麟普)다. 18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가 1890년 사간원정언·춘추관기주관 등을 지냈다. 그 뒤 1892년에 성균관사성이 됐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한 뒤 나라의 형세가 어지럽게 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했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어도 나가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다가 1901년에 최익현을 사사한 이후로 성학(聖學)의 대도를 배워 학업에 더욱 정진했다.

신협(申梜, 일명 申棖)은 일찍이 화서를 비롯해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를 섬겼으며, 고산 임헌회의 문하도 출입했다. 면암 최익현이 정산에 내려온 뒤에는 면암을 스승으로 모시고 1905년 1월 노산 궐리사 강회를 주선했다. 충남 서천의 월지동(月芝洞)에서 살았다.

화서 이항로의 생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민영 책임연구위원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민영 책임연구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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