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윤리와 동아시아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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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윤리와 동아시아적 가치
  • 경희대학교 송종서 강사
  • 승인 2018.09.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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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12>
2014년 9월에 발표된 전세계 공자학원 및 공자학당 운영 현황.

동아시아 경제기적 유교 윤리와 아시아적 가치 주장
영국 프로테스탄티즘 일본 자본주의는 유교자본주의
신유학 문화의식은19세기 양무운동 중체서용론 뿌리
유교문화 계승 냉철하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이뤄져야


■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문화론
1960년대 말 세계 제2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일본과 대조적으로 중국은 문화혁명(1967~1977)이라는 ‘정치우선’의 ‘이상주의’가 지배해 절망의 10년(十年大動亂]을 보내야 했다. 1970년대 말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들(四小龍: 대만·홍콩·싱가포르·한국)’ 곧 신흥공업국들(NICs)이 세계 경제의 무대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또 중국은 망연자실 지켜보아야 했다.
1980년대 들어 칸(Herman Kahn)과 버거(Peter L. Berger)는 동아시아 경제 기적의 원인을 탐구했다. 그들은 정치적·법률적·경제적·지리적 요인을 연구하는 정치경제학적 접근(구조론적 해석) 방법이 아닌, 그 근저의 사회적·문화적 요인을 중시하는 문화론적 해석 방법을 택했다. 그들이 파악한 문화적 요인은 ‘유교 윤리’였다. 이로부터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가 주장됐다. 신흥공업국들의 경제성장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인치(人治)와 인정(仁政) 사상에 바탕을 둔 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에 기인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Mahathir Mohamad)와 싱가포르 총리대신 리콴유(Lee Kuan Yew) 등도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했다.

■ 유교자본주의와 유교사회주의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유교를 결합한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오일쇼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된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서다. 1978년 모리시마 미츠오(森嶋通夫)는 영국의 자본주의를 프로테스탄티즘(新敎)자본주의라 한다면 일본의 자본주의는 유교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續英國と日本)고 하여 일본의 경제적 성공을 유교자본주의로 언명한 바 있다. 또 1984년 재일 한국인 학자 김일곤(金日坤)은 유교자본주의의 틀로 과거의 현상을 분석했을 뿐 아니라 미래의 비전까지 제시했다. 유교에 본래 존재하는 자연·역사·인간의 조화의식을 계승하고 가족 집단주의적 질서와 윤리를 계승하며 덕치주의와 경제윤리를 조화시키고 ‘덕본재말론(德本財末論)’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儒敎文化圈の秩序と經濟)

1988년 시마다 겐지(島田虔次)는 “청교도주의(Puritanism)와 돈벌이가 결합될 수 있다면 근세 유교(宋學)의 금욕주의와 돈벌이도 결합될 수 있다. 나는 유교자본주의 설을 긍정할 수 있다.”(現代における儒敎哲學,思想)고 하며 유교자본주의론을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공업 국가들의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확대 적용했다.

한편 1989년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일본 자본주의는 유교가 아니라 일본의 전근대 사회의 특질과 관련짓는 것이 바람직하며, 유교는 중국의 사회주의와 더 잘 결합될 수 있으므로 유교자본주의보다 유교사회주의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유교 르네상스에 즈음하여, 방법으로서의 중국, 산지니, 2016.)

■ 현대 신유학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 신유학은 1919년 오사신문화운동 기간(1917~1927)에 중국 학술계에 등장한 신유학 사상이다. 신유학은 송명유학을 가리키며, ‘현대’라는 수식어는 이 기간에 전개된 동서 문화 논쟁(東西文化論戰)과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科玄論戰)을 거치면서 발휘된 현대 학술이기 때문이다. 현대 신유가 1~2세대는 1949년 이후에도 다수가 대륙에 남았고, 3~4세대는 모두 대륙을 떠나 홍콩·대만과 북미에 정착했다.

4세대 두유명(杜維明), 성중영(成中英), 유술선(劉述先), 여영시(余英時) 등은 중국 국적은 아니었지만 1980년대 중국의 ‘문화 붐(文化熱)’에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유교자본주의’와 ‘아시아적 가치’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나 그 담론에 뛰어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중국 정치권과 사상·문화계가 현대 신유학에 적잖은 관심을 가진 것과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과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10년간 중국 정부는 현대 신유학을 국가 연구 프로젝트로 삼아 공식 지원했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현대 신유학의 친연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특히 1989년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시급히 새로운 문화 이데올로기를 모색해야 했던 중국공산당의 수요와 현대 신유가의 애국주의·민족주의 정신이 결합한 것이기도 했다.

현대 신유학의 문화의식은 19세기 양무운동의 중체서용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 정부가 신유학에 요청한 ‘역할’은 ‘중체’ 곧 중화의식의 고취에 다름 아니다. 현대 신유학은 정치·경제·법·제도에 대해 문화적 요인의 주동성을 강조하는 문화결정론의 모태에서 생성됐고, 본질적으로 오사신문화운동의 ‘국체’와 ‘민족’을 중심에 둔 강렬한 애국주의·민족주의와 불가분한 관련을 맺고 등장한 인문주의 사조다.

지금 현대 신유학의 본성은 새로운 중화제국 건립을 위한 문화 이데올로기의 중심축으로 변용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내부에선 1990년대 말부터 ‘국학 붐’을 일으키며 주요 대학마다 ‘국학원’을 설립했고, 국제적으로는 ‘공자학원’을 세계의 각 대학에 설치하고 있다.

■ 한국인의 유학 연구와 유교문화 계승
유교사상은 지금도 한국인의 의식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하기 때문에 유학에 대한 맹목적 긍정 또는 부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이 갈수록 거세지는 신중화제국의 풍랑 속에서도 도도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중화의 주변부로 남거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의 변방으로 남아 근근이 생존하기를 구하는 데 있지 않다. 한국인의 유학사상 연구 및 유교문화 계승이 근본적으로 냉철하고 주체적이며 비판적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공자학원 로고 2005년 1월 18일 공자학원은 ‘漢’의 간체자 ‘汉’을 변형시켜 만든 로고를 발표했다. 당초에는 둥근 원 안에 있는 ‘汉’만을 썼다. 같은 해 7월 그 둘레에 지구를 상징하는 원을 그려 넣었고, ‘汉’도 비둘기 모양으로 변형시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전 세계를 난다는 의미로 확정했다. 이 로고에는 “전 세계, 중국어, 평화, 부상” 등의 네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공자학원이 추구하는 바의 평화로운 방법으로 중국어를 통해 전 세계에 중국을 알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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