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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 판타지

탁, 데구루루, 톡.

가을의 신호를 꼽으라 한다면 밤 익는 소리를 꼽을 테다. 지붕이 꿀밤 맞는 소리가 들리는 요즘이다. 지난 주말, 동네 이모들과 함께 밤을 주우러 갔다. 밤 줍는다는 말에 일요일 늦잠을 포기하고 냉큼 쫓아간 길, 아침 이슬 피어나는 논길을 헤쳐 집결지로 모인다. 집 뒤 밭을 지나 대나무 숲을 뚫고 가시나무를 헤쳐 도착한 밤나무 숲 아니 이곳은 밤밭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테다. 나무 위를 쳐다볼 필요도 없이 발밑에 펼쳐져 있는 밤 세상이다. 조용한 숲에는 밤 떨어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밤송이) 까지 말고 주워” 내가 밤송이 하나 붙잡고 있는 동안 밤톨 다섯 개를 줍던 이모가 답답했나 보다. 정말 손이 빨라졌다. 땅만 쳐다보며 정신없이 밤을 줍다 보니 일행을 놓치기 일쑤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거늘, 그 시절 나무꾼은 왜 항상 정신을 빼먹어 도깨비에게 홀리는가. 저 멀리 이모들이 부르는 소리가 진정 사람의 소리인지, 툭툭, 밤의 소리인지 도깨비 소리인지 아득하다. 자연의 풍요는 사람을 홀리고도 남는다.

“예전엔 밤 줍는 사람이 많아 밤이 남아나질 않았는데….”라고 이모가 말했다. 그렇다. 밤밭이 너무나 고요하다. 밤 신세가 어찌 이렇게 됐을까. 밤이 예전만큼 귀한 음식이 못 되는 탓인가, 마을에 젊은이가 없는 탓인가, 밤 주울 여유조차 없이 사는 탓인가. 밤 많다고 철없이 좋아하던 내게도 어쩐지 이모의 말은 쓸쓸히 들린다.

“오늘날 영화는 너무 과잉되어 있습니다. 색채, 효과음, 대사, 음악, 어느 것이나 북적거립니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소리가 소용돌이치고 튀어나오고 진동합니다. 저희는 ‘되돌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이다.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그는 평생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 등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이 있다. 이 책은 그가 다음 세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어린이 문학 50권의 추천사고, 그가 영화를 만드는 철학을 담은 책이다.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아이들, 때로는 중년을 위해서도 만들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앞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평생 ‘판타지’를 만들어온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판타지’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덜어나가는 방향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흥청거려도 저희는 온화하고 차분한 방향으로 키를 돌릴 생각입니다. (중략) 그 방향에 우리가 찾는 새로운 판타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한 시간쯤 주운 밤이 바구니 하나 가득하다. 벌레 먹은 밤이 섞여 있어 골라내 손질한다. 껍질을 벗겨 설탕에 조리면 훌륭한 간식이 된다. 잠깐만 한다는 것이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해가 저물어있다. 톡, 톡, 가을 밤 도깨비에 홀린 것일까. 톡, 톡, 톡. 지붕 위로 밤 내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온다.

아침이 되면 밤은 또 거짓말처럼 내려 또 나를 부른다. 손이 근질거린다. 자연은 언제나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맺는다. 거두기만 하면 되는 풍요, 도깨비방망이 같은 자연을 우리는 잊은 게 아닐까. 어리석은 건 도깨비에 또 홀리는 나무꾼이 아니라, 손 뻗으면 닿는 풍요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우리가 아닐까. 이 가을, 새로운 판타지는 시작됐으나 우리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늘 밤, 가을의 새로운 판타지를 줍는다. 톡톡.

이동호 <홍동면>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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