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쒀서 내가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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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쒀서 내가 먹자!
  • 김옥선 기자
  • 승인 2019.01.1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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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탐구생활
쌀알이 곱게 퍼지도록 끓여낸 휜죽은 반드시 외간장과 참기름 한 방울과 함께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태어나서 처음 독감에 걸렸다. 감기몸살과는 차원이 달랐다. 엄청난 근육통과 고열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고 열이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기침으로 정신이 알딸딸해졌다. 혼자 사니 독감을 퍼트릴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전기요를 켜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자니 처량 맞았다. 독감에 꼭 먹어야 한다는 ㅇㅇ약은 환각 혹은 환청의 부작용으로 먹는 일이 조심스러웠지만 그래도 먹어야 했다. 빈속에 약을 털어 넣기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스웨터에 목도리를 칭칭 둘러메고 싱크대 앞에 섰다.

어릴 적 몸이 아플 때면 어머니는 하얀 쌀죽을 끓여주고는 했다. 그 때는 그 맛을 몰랐다. 외간장의 쿰쿰한 냄새,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 쌀을 왜 먹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긴 몸이 아프니 입맛도 없고, 그저 어머니가 먹으라고 떠 넣어주니 입만 벌려 낼름낼름 먹고는 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위가 좋지 않은 어머니는 항생제를 견디지 못해 먹는 족족 구역질을 했다. 병원 밥도 겨우 한 두 수저 먹고 밥숟가락을 내려놨다.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집에 가서 찹쌀 한 수저에 물을 잔뜩 넣고 미음을 끓여 보온병에 담아 병원에 왔다. 그나마 미음은 조금 드셨다. 하루가 지나고 어머니가 끓여줬던 흰 죽이 생각났다. 달궈진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충분히 불린 쌀을 넣어 쌀알이 투명해질 때까지 약불에서 볶는다. 쌀 양의 4배 정도 분량의 물을 넣고 팔팔 끓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인내의 시간이다. 약불에서 천천히 저어가며 쌀알이 퍼질 때까지 끓이면 된다. 보온병에 담아 병원에 가지고 와 어머니에게 드리니 천천히 꼭꼭 씹어 드신다. 죽이라 많이 씹을 것도 없는데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쌀을 믹서기에 갈 것 그랬다. 그래도 흰죽을 드시고 나서부터는 병원 밥도 잘 드시고 몸을 회복해 퇴원을 했다.

죽은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음식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곡식이 퍼지도록 묽게 끓여내는 죽은 거의 모든 재료와 궁합이 맞는다. 미역, 각종 야채, 참치, 수산물, 육류, 나물류 등을 잘게 다져 함께 어우러지게 끓여내면 된다. 몸이 아플 때를 많이 떠올리며 죽을 생각하지만 기력이 떨어졌다고 느껴질 때나 입맛이 없을 때 죽 한 그릇을 먹으면 원기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고는 한다.  죽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혼자 있을 때는 잘 해먹지 않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같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혼자서라도 끓여먹어야 한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땅한 야채들이 없다. 찹쌀도 없다. 쌀만 불려 죽을 끓여 식탁에 놓고 보니 무언가 허전하다.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참기름 한 방울과 외간장이다. 죽에 아무런 간이 없으니 외간장 한 수저를 넣고 동치미 한 숟가락 떠먹으면 속도 편하고 든든한 한 끼가 된다. 그렇게 죽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약을 먹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환청은 들리지 않지만 눈앞에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이 약이 주는 환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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