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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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63>
  • 한지윤
  • 승인 2019.02.0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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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이 곳은 미용실이 잘 되는 곳인가요?”
“어업관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사치하잖아요. 어머니가 살림을 해 주고 조수 한 사람 두고 둘이서 일하고 있어요.”
약혼자가 죽은 뒤, 반 미망인 비슷한 기분으로 살고 있던 그녀가 서울의 회사원과 알게 된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 때 그녀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집 앞에 세운 자동차에서 내린 30대의 남자가 자동차 팬벨트가 끊어져, 정비공장들이 휴일이라서 이 근방에 개인이 하는 조그마한 정비공장이 없는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런 공장이라면 팬벨트 정도는 휴일이라도 수리해 줄 곳이 있다고 그녀는 말해 주었다.
선영은 가게에서 500미터쯤 되는 거리에 있는 정비공장을 알고 있었다. 정비공장 주인의 아내가 선영이 미장원의 단골이었기 때문이다. 선영이는 그 남자에게 자전거를 한 대 빌려 주고 자기도 한 대를 타고 정비공장으로 안내했다. 다행스럽게도 주인이 있어 수리를 해 주기로 했다. 그 동안에 남자는 선영에게 커피를 권해서 근방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는 쾌활해 보였다. 건네주는 명함에는 서울의 종합상사 사원 신평수라고 적혀 있었다. 낚시의 명소인 예당저수지란 곳에 친구의 별장이 있어 놀러 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솔직하게 ‘당신의 명랑하고 솔직한 성품이 마음에 듭니다’ 하면서 ‘다음 주에 다시 올 예정이니 일요일 저녁에라도 만나 주시겠습니까?’하고 그는 청했다. 선영이도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데이트가 즐거웠다. 매일 여자들만 상대하는 직업이라서 그런지 젊은 남자와 이야기라도 해 보고 싶은 심정도 있어 다음 주의 데이트 약속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신평수는 내년 초에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선영이가 ‘어째서 일요일에 약혼녀와 만나지 않죠?’하고 물었더니 그 약혼녀는 결혼 전에 최후로 추억을 남기고 싶다고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지금 유럽여행 중이라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평수는 그 다음 주 약속대로 찾아 왔다. 선영이는 그와 함께 S호텔에 갔다.
평수는 젊은 남녀가 서로 알게 되면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였다. 두 사람의 교제는 평수의 약혼녀가 외국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1주일에 한 번 꼴로 만남이 계속되었다.

평수와의 이런 교제는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선영으로서도 완전히 엔죠이에 불과했다. 서로가 책임이나 기대나 언질 같은 것은 물론 없었고 정신적으로도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는 교제였다. 자립하고 있는 남녀 사이라서 그런지 그쯤은 즐겨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평수는 건강하게 ‘잘 살아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약혼녀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선영이 역시 ‘즐거웠어요. 평수씨는 회사에서 출세할 거예요. 새로 맞는 신부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란 말로 이별을 했다.
해가 바뀌고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도  선영이는 할 수 없다. 하는 담담한 기분이었다.
남자에게 이야기를 해도 다른 뾰족한 방법도 없을 성 싶었고 또 수술비용 정도는 받아낸다고 해도 가슴속에 간직한 그 아름다운 추억을 구겨 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기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 입덧이 심해서 같이 살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는 곧 알게 되었지만, 상대의 남자는 누구라고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선생님, 수술이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한 박사가 아연해 할 말을 선영이는 더 계속했다.
처음에는 몸이 좋아지지 않아서 화도 났지만 손님이 계속 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대로 일하고 있었더니 어머니가 성화를 해서 시립병원으로 가본 것이다. 물론 한 박사를 신뢰하지 않는 심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도 역시 임신이라는 진단이 나와서 선영이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이렇게까지 해도 살아있는 이 아이는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인가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트, 수영, 축구 등 운동이라면 만능에다가 체력도, 건강도 자신이 있다는 평수를 닮았을 생각이 들었다.
선영이는 처음부터 결혼에 실패한 여자인 데다, 나이도 서른 가깝게 찼으니 아이를 하나쯤 가져도 좋지 않겠는가라는 속셈을 했다. 가령 선영이가 결혼을 한다면 두 번이나 식도 올리기 전에 실패한 여자이므로 다시 새 출발을 하게 될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해 주지 못하는 남성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 그 시기였기에 선영이는 수술의 실패는 차라리 잘된 일이다 싶어 오히려 감사하게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수술은 뱃속에 들어있는 아기에게는 큰 시련이었을지 몰라도 이 아이는 운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선영은 이렇게 강한 운명을 타고난 아이는 태어나서도 그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차츰 굳어져 가기까지 했다. 이상하고 묘한 심리였다.
뱃속에 든 아이가 생명을 건졌다는 운명에 선영이가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한박사는 자기 기술의 부정확성을 비꼬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모레는 꼭 진찰을 받으러 오도록 일러두고 한박사는 일어섰다.
선영이가 한 박사에게
“선생님, 댁으로 가시려면 버스는 저 쪽 이예요.”
하고 가르쳐 주었다. 한 박사는 이대로 병원에 갈 기분이 나지 않았다.
“좀 더 거닐다 가죠.”
하고 방향도 없이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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