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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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70>
  • 한지윤
  • 승인 2019.04.0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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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전화를 끊고 한 박사는 영은이 엄마의 목소리로 보아 딸과의 사이가 이 이상 견딜 수 없다는 태도라고 느꼈다. 그런 심리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세상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서로 싸우는 일이 너무도 많다. 부모, 자식 사이만 끊는다면 다 의좋게 살아갈 사람들이라도, 한 지붕 밑에서 부모와 자식으로서 산다는 당연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만으로 서로 미워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걸고 상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불구하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윤리만 없어진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들이 많다. 어느 쪽인지 상대를 거부하여 심하면 죽이고 자살도 하고 병이 되고 하는 것보다는 집을 나가는 것이 훨씬 좋을지 모른다.
이런 가출보다 더 쉬운 방법은 서로의 양해 하에 일시적인 별거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런 방법이 아파트를 빌어 나가서 산다던지 아니면 이런 입원 같은 것이다. 한 박사는 이 점을 감안해서 영은이의 도피처를 제공해 주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선영이 병원에 찾아온 것은 오후 3시가 지나서였다. 석양의 햇살이 진찰실의 한 쪽 창문에서 넘칠 듯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때였다.
“왜 오시지 않나 생각했지요.”

한 박사는 다정스럽게 말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죄송해요. 옆집 과일 집 딸이 이 번에 맞선을 본대요. 그래서 양장점에 같이 가자고 해서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오전 중에는 시내까지 갔다 왔어요.”
“그랬었군. 그것도 모르고 난 장승처럼 기다렸군.”
이 정도로 느긋한 기분이라면 이 여자는 잘 살아갈 것이라고 한박사는 생각했다.
“배가 불러와 보기가 싫다고 엄마가 강요해 복대를 했어요.”
선영이는 진찰 커텐의 저 쪽에서 말했다. 한 박사는 일상 쓰고 있는 원형의 표에서 선영이의 임신 월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먼저 기록된 차트의 최종 월경에서 계산하면 지금 26주에 접어들고 있었다.
“잘 자라고 있는데…….”
한 박사는 자기가 한 수술이 실패한 것이 아니고 선영이가 그 후에 다시 임신한 것이 아닌가도 싶었으나 정작 그 것은 아니었다.
어느 창조주의 섭리를 받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인간이란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태아 때부터 하늘의 섭리에 따라 성장해가는 것이다.
이 지역 근처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는 수박도 전 같으면 8월이 성수기지만 터널이라고 부르는 비닐재배를 시작한 후부터는 6월에 출하하는 최성기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재배는 이직은 불가능하다. 빨리 성장한다는 것은 빨리 늙는다는 것이 된다.
빨리 성장하고 늙지 않는 묘방이라도 있다면 좋지만 그렇게 될 경우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밸런스가 어떻게 될지 중대한 문제가 아날 수 없다.

“정확하게 몇 달 된 거예요?”
“7개월 중간 정도인데, 태아의 심음을 한 번 들어 보도록 해요.”
초음파의 도프라 효과를 이용한 심음 계를 귀에 대자 태아의 심장의 박동이 규칙적으로 맥박치며 들려오고 있었다.
“어머나, 정말 그러네. 아기는 살아 있네요.”
진찰을 끝내고 책상에 돌아와 한 박사는 선영에게
“혈액검사의 결과를 봐야 알지만 모든 게 순조로워.”
“시립병원에서는 예정일이 9월 중순쯤이라고 하던데요.”
“음…… 9월 20일이 예정일이 되겠어요.”
선영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대신 환생해서 태어나는 아들일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싫어요. 9월 20일이라니.”
“제삿날은 안 되나?”
“아니예요. 더운 때인데 배가 불룩해 있으면 숨길 수가 없잖아요.”
“그럼, 숨길 셈이었어?”
“아마 안 되겠지요.”
선영이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서
“지난 번 선생님과 헤어진 후에 그이와 우연히 만났어요.”
그녀의 말소리에 묘한 느낌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

선영이는 뒤에서 등을 툭 치는 사람이 있어 돌아다보니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남자가 서 있지 않은가.
역시 친구의 별장에 놀러 왔다고 했다.
“건강해 보이는데.”
“고마워요. 덕택으로,”
박선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배가 상당히 불러 보이는데.”
그녀는 모르는 척하는 남자가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이 남자가 역시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라고 대답하며 선영이는 무심결에
“보이 프랜드가 자기 하나뿐인 줄 아세요?”
불쑥 말하고는 웃어버렸다.
“그래애……?”
그도 역시 웃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눈을 한 번 껌뻑이고는 선영이의 등을 한 번 더 툭하고 쳤다,
“선생님, 그러고서는 ‘그럼, 잘 있어. 고마워,’라고 하더군요.”
“영화의 장면처럼 그럴 듯한데.”
“이런 소릴 하면 선생님은 웃으실 줄 모르지만요, ‘고마워, 잘 있어.”가 아니었어요. 혼자서 그 말의 순서를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렇게도 다른가? 난 문학적인 머리가 없어서 알 수가 없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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