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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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71>
  • 한지윤
  • 승인 2019.04.1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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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다르다고 생각돼요. 저는요. 그이가 이 번 일을 알고 있구나 싶어요. 그래서 끝말에 ‘고마워’라고 한 것 같아요.”
“무책임한 짓이 아닐까?”
“하지만 저 혼자의 결심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잖아요. 지금 제 자신이 결심이 굳어져 있어요. 일평생 그이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다고 말예요. 그런 비밀을 갖고 살아가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선생님, 어쩌면 바보 같죠?”
“왜 바보야? 좋다, 싫다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까 즐거운 일이지. 그건 그렇고 선영이 집에 한 번 가보고 싶은데, 괜찮아요?”
한 박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중절실패 문제에 대해 뒤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단단히 매듭을 짓고 싶어서였다. 선영이가 이 일로 이해하고 임신을 계속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영국에서 실제로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재판거리로 대두된 적이 있었다.
사아리주에 살고 있는 프로렌스·쥬리아라는 스물아홉 살 난 여자의 일이었다.
런던의 맨스턴 병원에서 중절수술을 받았으나 실패가 되어 7개월 후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지금 그 아이는 이미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 때 수술이 성공했더라면 이 아이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에 직장도 잃고 결혼의 꿈도 깨어졌다’고 한 것이 소송의 이유였다.
런던의 고등법원에서는 ‘국가가 중절을 인정하는 법을 제정한 이상 이 수술의 실패로 인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이유로, 중절수술에 실패한 의사에게 1억8700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이 여자에게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한 박사가 알고 있는 자료만으로는 어떻다고 평할 수는 없었으나 아마 의사쪽 에서도 그대로 승복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자궁의 기형은 가끔 있는 일인데 전적으로 의사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환자들의 횡포랄까, 파워랄까, 이런 것이 눈에 띄일 만큼 커지고 있다. 의사도 그렇다. 기술이나 인격이 의심스런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주사 하나 약 하나를 처방하면서도 환자의 동의를 일일이 구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환자들의 파워가 귀찮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 박사도 환자에게 설명은 하고 있었으나 동의를 얻는다거나 승낙을 받는 일은 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의사에게 배상청구를 한 영국 여자가 만일 중절수술에 성공했다면 ‘이 아이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고, 자기도 좋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과연 있을까?
그러나 이 영국 여자만을 비난할 일은 못된다. 사람이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일이 생길 경우 그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도 그것을 핑계로 해서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려는 근성을 국가나, 지방단체나, 정치가, 심지어 매스컴 그 외에도 어떤 단체들이 보호라는 명목 밑에서 후원하고 조장하고 있는 한, 국민 전체가 이 영국 여자와 같은 인간 이하의 심정에 빠져 들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오시겠다면 언제든지 환영하겠어요.”
“그럼, 내주 화요일 오후 1시쯤 어떨까? 그 날은 미장원도 쉬는 날이라고 하니,”
“기다리겠습니다.”
한 박사의 속셈도 모르고 선영이는 좋아 하고 있었다.
선영이가 돌아간 후에 수석간호사가
“선생님, 영은이 학생, 어느 병실이 좋겠습니까?”
공손한 말씨로 물으러 왔다. 보통 때는 이런 일로 물으러 오는 일은 없었다. 영은이 학생에게는 같은 입원실을 쓸 상대의 성격이나 병상들도 골라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글쎄, 민선이 산모가 있는 병실이 좋지 않을까?”
한 박사가 말했다.

민선 씨는 어제 이 병원에서 딸아이를 순산한 산모다. 29세로 몸집도 크고 아주 건강한 산모다.
“이민선 산모는 아직 배뇨가 안 돼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 보았습니다만, 힘들다고 해서 조금 전에 도뇨를 시켜 드렸습니다.”
민선 씨는 초산이었으나 순산이었다. 아가의 첫 울음 소리를 듣고는 ‘어머, 벌써 낳았어요?' 라고 할 정도의 순산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도 일시적인 폐뇨 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분만 전의 도뇨나 산후에 물을 먹지 않는 일도 있어서 산욕 최초 12시간 전후는 배뇨가 없는 것이다.
그런 증상은 24시간 정도에서 회복되는 것인데 이 산모의 경우 배뇨가 잘 안 되고 있었다.
한 박사는 영은이 모녀가 현관의 원형 대기실에 들어오는 것을 얼핏 보았지만 입원에 따른 절차는 수석간호원에게 맡겨 두었다.
한 박사가 민선 산모와 영은이 학생의 입원실에 들른 것은 그날의 진찰이 다 끝난 오후 6시반이 지나서였다. 입원실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잠시 멈춰 서서 방 안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여고생들처럼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노크를 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 어때요? 아직도 소변이 잘 안 됩니까?”
“아직……  어떻게 된 거죠? 이건.”
“곧 좋아질 겁니다.”
“수석간호원도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혹시 평생 동안 안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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