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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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72>
  • 한지윤
  • 승인 2019.04.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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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직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럼, 안심은 되지만.”
“학생은 어때? 학생은 병이 아니니까 무리해서 누워 있지 않아도 돼요.”
한 박사는 영은이에 대해서는 표면상으로는 그대로 일단 방임해 두기로 방침을 정하고 있었다.
식욕이란 것은 이상한 것이어서 먹어라, 먹어라, 하면 오히려 먹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 박사 자신도 전쟁 때 그 당시는 아직 어리기는 했지만 식량기근으로 먹는데 대한 비참할 정도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이라면 가리는 것 없이 아무거나 먹어 치우는 식욕을 가지고 있었다. 음식이란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먹고 싶은 것이다. 많은 음식을 눈앞에 늘어놓고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식욕을 죽이는 것은 없다. 밥을 잘 안 먹는 아이를 걱정하는 어머니들은 맛있는 음식을 늘어놓고 먹어라, 먹어라를 강요하고 있다.
한 박사는 영은이의 식사량을 수석간호원에게 물어 보았다. 반 그릇 정도는 먹고 있었다.
하루 한 번씩 한 박사는 영은이를 외래진찰실에 불러서 혈압을 재어보는 정도로만 하고 식사 같은 건 물어 보지도 않았다.
“무얼 하고 지내니? 매일.”
“노트 정리도 하고, 책도 읽고 뜨개질도 해요.”
“무리할 건 없지만 일정시간의 산책같은 것도 좋아요. 어머닌 지금도 걱정을 하고 계셔?”
“날마다 와요. 아무 병도 아니니 오실 것 없다고 해도요.”
“좋지 않아. 어머니도 운동도 되고 하니 오시도록 둬요.”

한 박사는 영은이의 체중을 체크하지 않았다.
사람의 체중이란 때로는 어느 정도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후였다.
한 박사가 점심시간의 휴식신책을 하고 돌아 왔을 때였다. ‘선생님’ 하며 조금 숨찬 소리를 내면서 영은이가 달려오며 불렀다.
“어딜 갔다 오는 길이지?”
한 박사가 뒤돌아보면서 물었다.
“친구가 솔개의 깃털이 갖고 싶다고 해서 주워오는 길이예요.”
영은이 손에는 몇 대의 다갈색 깃털이 쥐어져 있었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지? 아름다운 색깔도 아닌데.”
“모자에 꽂으려고요. 어때요, 선생님, 멋있죠?”
하면서 그 깃털 하나를 옆머리에 갖다 대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공작 깃털보다 더 좋은 색깔 같은데”
“선생님께 하나 드릴까요? 멋 내시게.”
“난 그런 것에는 취미가 없어. 미안하지만.”
“멋 좀 더 내세요. 선생님.”
“더 내라니? 더 란 말은 왜 붙이지?”
“엄마가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털털한 멋이 있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허허, 털털한 멋쟁이라.”

영은이는 마음도 몸도 더할 나위 없이 밝은 표정으로 한 박사와 걸음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선생님, 저요, 민선이 아주머니에게 배운 게 많아요.”
“민선이 아주머니?”
한 박사는 입원 환자의 이름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저하고 같은 방 쓰고 있는 딸 낳은 분 말예요.”
비로소 3.6kg의 아기를 낳은 영은이와 같은 병실의 산모를 생각해 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 분 비록 등치가 크고 살이 좀 찌고 둔해 보이는 것 같지만 꽤 훌륭해요.”
“그건 몰랐는데.”
“계모 밑에서 자랐대요. 처음은 반감을 갖고 반항적으로 대했대요. 훗날 생각해보니 그 계모 역시 자기들이 있어서 얼마나 싫었겠느냐 싶었대요. 언니와 여동생들과 짜고서 일부러 애먹였다나.”
“어, 그래?”
“그래서 어느 날 자기 계모에게 그 말을 다했대요. 그랬더니 계모가 울더래요. 울면서 ‘고마워, 그렇게 정직하게 말해 주어서 고마워, 정말’하고 말했다더군요. 그 후부터는 사이가 좋아져서 계모와 전처 딸 사이 라기보다는 오히려 언니와 여동생같이 지내고 있다더군요.”
“물론 그것도 좋지요. 굳이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지려고 하지 않아도……”
“그 후부터는 만사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대요.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간다고 마음먹었대요. 그 분 말예요. 소변이 안 나왔을 때는 걱정이 됐어요. 그래도 참 우스웠어요.”
“왜?”

“제가 입원한 다음 날이었어요. 수석간호사 있잖아요. 아줌마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어요. 나도 걱정이 돼서 뒤따라갔었어요. 아줌마는 긴장이 돼서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어요.
아줌마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수석간호사가 밖에서 ‘아주머니 준비 됐습니까?’라고 묻고 있었어요. ‘네, 됐어요’라는 대답소리가 안에서 나왔어요. ‘마음을 푹 놓으세요. 어려운 일 아닙니다. 산골짜기에서 깨끗한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있으니까요. 자, 여기 이렇게 흐르고 있습니다’하면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쏴아 하고 흘리고 있었어요. ‘점점 많이 흐르게 됩니다’하고 그랬더니 민선이 아줌마가 들어가 있는 화장실 안에서 쏴 하고 소리가 나기 시작했대요. ‘나왔어요, 나왔어요!’하며 좋아했다나요. 정말 그 아줌마 좋은 사람 이예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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