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대전방송국홍성중계소 세워져, 홍성의 방송뉴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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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대전방송국홍성중계소 세워져, 홍성의 방송뉴스 시작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9.09.2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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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신문 지령(紙齡) 600호 발행 특집

홍성지역의 언론 600년을 말하다<6>
‘KBS대전 60년’에 실려 있는 초창기 방송국 차량 사진. 초가집을 배경으로 신기하듯 구경나온 어린이들이 이채롭다.

홍성의 지역언론 형성에 또 하나 기여한 것은 방송뉴스였다. 1965년 홍성읍 옥암리(玉岩里)에 대전방송국홍성중계소(大田放送局洪城中繼所)가 세워졌다. 이때부터 홍성중계소(洪城中繼所)에서는 아나운서인 오철환(吳喆煥)으로 하여금 기자를 대신해 로컬 뉴스를 방송함으로써 지금까지 신문이 전하던 뉴스에 전파매스컴이 곁들여졌다. 개소한지 1년쯤 후에 홍성중계소에서는 아나운서를 여자로 바꾸고 기자를 따로 발령해 홍성출신인 유광진(柳光鎭)이 기자직을 맡았다.

이보다는 뒤늦게 대전문화방송국(大田文化放送局)에서도 홍성에 주재기자를 두기로 결정했다. 홍성에서는 한국일보와 뉴스자매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일보 주재기자인 김양수(金亮洙)가 우선 주재기자직을 맡아 활동했다. 이로써 홍성지역은 충남도내 서부지역의 언론센터 구실을 완벽하게 갖춘 셈이 됐던 것이다. 홍성지역에서의 언론종사자들은 신문지국장이나 기자 이외에도 방송국 기술직원, 아나운서, 방송기자 등 다양한 형태로 그 수를 더해갔다. 이런 진용은 1972년 언론정화법이 시행돼 지방주재기자의 주재지를 전국 시청소재지로 국한시킴으로써 일시적으로 천안(天安)으로 이동되기도 했다. 그 이후 프레스·카드제도가 약간 완화되면서 지역적 위치로 볼 때 각 신문사가 다시 홍성에 주재기자를 배치함으로써, 언론중심지로서의 성격을 되찾았다. 각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취재여건에 치중해 홍성을 주재기자 상주지역으로 되살린 이후, 기자들의 이동도 빈번해졌다. 본사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또 다른 지방으로 그 이동은 중앙일보, 서울신문 등이 수위를 다퉜다. 이렇게 이동이 시작되면서 이 고장 출신이 아닌 외지 출신 기자가 지방출신 기자보다 더 많았던 경우도 발생했으며 하숙을 하는 기자도 늘어났다. 한 때 홍성 중앙일보 주재기자로 근무했던 황병용(黃炳龍) 기자는 총각으로 부임해, 홍성여자중학교(洪城女子中學校)에서 근무하던 세계평화봉사단(世界平和奉仕團) 미국인(美國人) 여자와 연애결혼을 한 후 미국(美國)으로 함께 건너간 경우도 있다.

지방주민들도 이제 지방주재기자를 직업인으로 새롭게 인식해갔고 본사에서도 지방부를 편성, 이들 기자에게 모든 지시를 내렸다. 이쯤해서 홍성지방의 언론은 전국 독자층을 상대로 한 기사를 발굴해 냈고, 신속한 사건보도에 따라 그날의 신문 사회면 머리기사가 홍성발(洪城發)로 곧잘 터져 나와 전국의 독자나 시청자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보도되는 기사의 내용도 다양했다. 서산(瑞山)지방의 어선전복사고로 어부나 낙도(落島) 주민 20~30명이 한꺼번에 익사하는 기사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사상 처음으로 대법원(大法院)의 선거소송에 따른 투표함 현장검증을 홍성군청(洪城郡廳)에서 실시해 낙선했던 신민당(新民黨) 소속 김옥선(金玉仙)이 당선 번복판결을 받았던 뉴스가 보도돼 전국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우리나라 언론사상 단 한 사람의 생명 때문에 장장 14일간 신문 사회면 전체를 계속 뒤덮었던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 구봉광산(九峰鑛山)의 광부 양창선(楊昌善)매몰사고기사 등이 이곳 홍성주재기자들이 전담했던 기사들이었다. 이밖에도 홍성발 기사는 신문이 사설(社說)로까지 논란을 펴야했던 기사도 많았다. 홍성군 광천읍에서 기피자단속책의 하나로 ‘기피자의 집’이라고 써 붙여 인권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사도 큰 반응을 보였다. 또 돼지 값 폭락으로 홍성군 홍동면(洪東面)에서 산 돼지 새끼를 농민이 갈고리로 잔인하게 때려죽인 기사 등은 독자들을 쇼킹하게 자극했던 기사이기도 하다. 또 홍성발 기사로는 조국이 독립한지 25년이 지나도록 임오군란 중 항일항쟁에서 순사한 홍성군 구항면(龜項面) 출신 이충순(李忠淳) 열사의 넋이 건국포상에서도 제외된 채 지하에 묻혀버렸던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 잊혀진 애국혼(愛國魂)을 되살려낸 훈훈했던 기사도 보도됐다. 천재지변인 1978년 10월의 홍성읍 지진기사와 물난리를 겪은 보령군(保寧郡) 수해기사 등을 신속히 취재해 실감 있게 전달한 기사로 꼽혔다.

한편 신문이 지역기사의 보도에 치중하면서 경향신문에서는 칼라 페이지를 할애해, 내 고장을 소개하는 홍성에 관한 특집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TV가 대전방송국(大田放送局)에도 생겨, 라디오 로컬뉴스가 TV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TV취재기자는 KBS 이영화(李盈和) 기자가 겸직함으로써 이 지방에서 발생되는 중요기사가 화면과 함께 생동감 있게 전달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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