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박시창(朴始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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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박시창(朴始昌)선생
  • 전용식 기자
  • 승인 2007.08.2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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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한국광복군 박시창(朴始昌)선생(1903.11.5~1986.6.7)

선생은 1903년 11월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16년 서울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하였다.

오성학교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수록 민지(民智)를 일깨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로 생각하고 교육사업에 치중하던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장 박은식이 설립했던 학교였다. 오성학교 졸업후 선생은 부친 박은식이 1925년 타계할 때까지 그를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3ㆍ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21년 선생은 상해에서 부친 박은식, 박경산(朴景山), 박태하(朴泰河) 등과 함께 사민보(四民報)를 발행하였다. 사민보는 16면의 일간지로 배일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1923년경 선생은 조선인청년동맹회(朝鮮人靑年同盟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선생의 부친 박은식이 서거하였다.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을 지냈던 그에 대한 장례는 국장례(國葬禮)로 거행되었다. 1926년경 선생은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입교하였고 동년 중국의 제1차 북벌전쟁(北伐戰爭)이 시작되자 중국 국민혁명군 포병대에 편입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선생은 1928년 남경의 군관단(軍官團) 입대를 거쳐 1929년에는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8년 동안 복부하였고, 1930년 하남(河南)의 염풍전(閻馮戰)에 참가하였으며 1932년에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자 정예부대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935년경 선생은 김구(金九)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활동에도 협력하였다. 1937년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다가 1940년경 선생은 호북성(湖北省) 의창(宜昌)으로 가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는 일본군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장강(長江) 북방 고지를 3개월 동안 사수하는 수훈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중국군에 복무하던 선생은 1941년 당시 중국 군사교육과 관련하여 최고의 엘리트과정이었던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하여 군사학을 연마하였다. 졸업 후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高級參謀)에 선임되었다.

특히 선생은 8ㆍ15직후 많은 한국 교포들이 몰려있던 상해 및 인근지역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한적(韓籍) 사병들의 귀국 알선에도 진력하였다. 1946년 귀국 후 선생은 국군에 입대하였고, 6ㆍ25전쟁에 참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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