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회적 공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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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회적 공감력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1.20 08:3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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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구체제를 폐기하고 낯선 사회체제로 사회생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는 것이 혁명이다. 남다른 눈빛과 한계를 넘나드는 열정, 자신을 감동하게 하는 자기 혁명, 새 시대의 패러다임을 읽어내는 혜안을 전제로 한다. 우리 역사에 전 국민이 하나로 민족적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한 예가 많다. 3·1운동, 국채보상운동, 금 모으기 운동 등이 그렇다. 반면에 정세를 오판해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을 겪었던 뼈아픈 기억도 적지 않다.

요즘 코로나19에 대한 각국의 대응과 미국·중국·러시아 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비관적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새로운 시선, 냉철한 가슴으로 세상을 보는 자세가 더 각별한 이유다. 산업사회가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였다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지식기반 산업사회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다극 체제로 대전환되는 시대에 맞설 수 있는 전략, 급격하게 진행되는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함께 탈 수 있는 채비가 필요한 것이다.

17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근면 혁명이 일어났다. 농업사회에서 ‘근면하고 부지런하다’라는 것은 기본으로 지켜야 할 행동강령 같은 것이었다.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인류사회가 산업사회로 급격히 전환돼 인류의 삶은 크게 바뀐다. 인간이 자본, 기술과 노동을 결합해 창조한 산업은 개벽에 가까웠다.

반면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소수의 거대 상인과 대자본가들이 불공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으려는 중상주의 체제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는 완전한 자유로운 사회를 꿈꿨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면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계급이 발생하고, 그 계급에 의한 차별적 대우와 인간이 가지는 이기심과 물욕은 사회의 분열과 대립, 갈등을 부추겼다. 결국 산업혁명도 세상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는 행태를 지속했다.

조선과 일본,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수년 동안 공존하다 산업혁명이란 대분기(大分岐) 앞에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두 나라에 비교해서 산업혁명을 거부한 조선은 대한민국의 독립에도 이바지한 게 미미하다. 그것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1945년 신탁통치가 결정될 때나, 1948년 남북분단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국제사회를 향해 아무런 발언권도 행사할 수 없었다. 한 개인의 삶에서도 매사 선택과 판단이 그의 운명을 가르듯, 거대한 파도가 되어 우리 근현대사를 덮쳤다.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고, 일제의 수탈과 전쟁으로 남한은 거의 초토화됐다. 삶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상대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는 일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움직였다 하면 이기고 모두에 앞서 성공하는 것은 정세를 미리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모두 어떤 형태의 희망을 품고 있다는 역설적 의미도 있다. 힘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때 그 길에 희망도 동행하는 것이다. 

정조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성군이다. 정약용에게 정조는 스승이자 멘토였다. 정조 역시 정약용을 무척 총애했다. 정약용은 위대하지만, 비운의 정치인이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터럭만큼도 병통(病痛)이 들지 않은 곳이 없는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했다. 올곧게 직언하고 목숨과 바꾸는 사람을 역사에서 더러 찾을 수 있으나, 현대사회에서는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가능한 것은 조금 더 폭넓게 세상을 보면 시작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거기에 새로워진 비전과 실천 행동이 동반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에서도 협상이 비즈니스에만 쓰이는 기술이 아니라 소소하게 물건값을 깎고 상대의 마음을 돌리는 등 일상생활에도 필요한 기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헤아릴 수 없지만, 이름도 남김없이 역사의 흐름에 홀연히 몸을 던진 의인도 많다. 승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역사에서, 기타로 분류되는 삶은 대중의 눈길이 차갑고 야박하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름 없는 의병들을 조명한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주목받은 것도 그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중국의 성인도 “백성을 위해 왕을 세우는 것이지, 왕을 위해 백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상이 바뀌길 원한다면 나 자신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라! 멋진 원점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에 닥쳐올 새로운 질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는 사람을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동력이다. 목표를 보라, 그리고 목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라!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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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 2022-01-20 18:30:20
공감합니다.

조호삼 2022-01-20 13:38:51
잠시 잊고사는 삶에 목표를 돌아보게 한 글 입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지만 뚜벅뚜벅 걸어갈 때 그 길에 희망도 동행할 것 같습니다.

홍성 2022-01-20 12:19:52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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