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시민으로서의 혐오발언에 대한 기본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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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시민으로서의 혐오발언에 대한 기본자세
  • 김혜진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7.17 07:40
  • 호수 900호 (2025년 07월 17일)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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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김혜진</strong><br>홍성녹색당<br>칼럼·독자위원<br>
김혜진
홍성녹색당
칼럼·독자위원

왜 여성가족부가 필요한지, 왜 아직도 성평등을 논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입을 꾹 닫게 할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7일, ‘여성은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라며 성신여대와 광주여대에 폭발물 테러 협박 메일이 발송된 것이다. 다행히 폭발물은 없었지만, 이는 여전히 이 사회에 여성을 동등한 권리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뿐 아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는 여성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흉기 테러를 계획한 남학생이 붙잡히기도 했다. 여성을 멸시하고 배제해 온 역사는 ‘아직도’ 장소를 불문하고 존재하며 시간적으로도 인류 역사와 함께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협박 메일을 보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여성은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걸까? 그가 ‘남성연대 회원’임을 자처한 바는 논 외로 치더라도, 이를 유추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방송인 김숙의 미러링으로 이제는 개그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여자는 집에서 애나 봐라, 나서지 말라, 조신해야 한다, 와 같은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이러한 혐오표현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시켜 왔고 이런 말을 들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성은 차별해도 차별당해도 되는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차별과 폭력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말이 칼이 될 때》 홍상수/ 어크로스/ 2018년 1월/ 14,000원

법학자인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에서 저자는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이유를, 혐오표현은 표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실제 차별이 일어나는 현실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때문에 혐오표현에 한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우선할 수 없다. 혐오표현은 차별과 폭력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뭐 그런 걸 가지고 예민하게 구냐.’며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 편견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도 누구 한 명이 내뱉는 순간 그 공간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저렇게 말해도 괜찮네,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문제의식은 힘을 잃고 만다. 혐오표현은 당사자의 상상 속 불안감도 아니고 당시 느낀 불쾌감 따위의 문제도 아니다. 명백히 입증할 수 있는 고통과 폭력을 수반하기에 문제가 된다. 

강남역 사건 등을 통해 여성혐오라는 말이 공론화되고 이제는 혐오표현이라는 단어가 낯설지만은 않은 시기이다. 그럼에도 혐오라는 말은 너무 과한 것 아니냐, 웃기려고 한 말도 예전처럼 쓰지도 못하니 답답하다, 는 이야기들을 온라인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과연 혐오표현이라는 단어 자체, 그리고 혐오표현에 해당되는 언사들을 혐오발언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과한’지는 누가 결정하는 걸까?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평등하고 존엄하며 폭력과 배제로부터 보호받는 사회에서 살기 위해 여성 등 소수자의 동료 시민으로 알아야 할 중요한 지점이다. 발화자가 아닌 청자만이 그것이 과한지 결정할 수 있다. ‘된장녀’에 많은 여성들이 발끈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매우 활동적인 성소수자 활동가가 단순한 혐오 구호를 접하고 무너지는 모습에 충격받았음을 고백한다. 고통은 고통받는 자만이 알 수 있다.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의 이준석의 문제의 발언처럼, 혐오표현은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문제가 된다. 저자에 따르면 의도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럴 때 동료시민으로서 우리는,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하지 말고 의도치 않은 부정적 효과에 너무 무심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나는 모르고 했는데 매우 유해한 발언을 한 거구나 하고 배우고 또 반성하는 것이다.

또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역사적 맥락이 명백하기에 혐오표현은 수위에 상관없이 위험하다고 한다. ‘이런걸 가지고’ 라는 말이 유효하지 않다는 말이다.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고 여전하며 미래에도 쉬이 사라지지 않을 이 상황에서는 혐오표현은 당사자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칼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성애자는 나가 죽어라.’라는 말을 하거나 ‘개독’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내가 이성애자이고, 크리스천인 것이 회사에서 발각될까봐 불안해하지 않는 것은 차별의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 수위는 괜찮지 않냐, 의도가 없었다, 라고 하며 듣는 사람에게 타박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말하는 사람이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을 고려해 발언하는 것이 옳다. 이를 위한 합의는 사회 전반적인 교육과 토론이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사회를 떠받치는 수많은 개인들이 각자의 소수자성으로 고통받아 일상이 불안정한 한국에서, ‘우리 사회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긴 한데 민생이 더 시급하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는 이재명 대통령이 답답한 이유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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