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 오래된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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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트] 오래된 시(詩)
  • 윤여문<청운대 교수, 칼럼위원>
  • 승인 2014.06.05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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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데려다 준 곳은 절망의 세계/(...)/후회의 반은 내 몫이 아니야. 나는 그저 슬며시/뒤를 돌아본 것 밖에 없어 느끼한 명상 같은 가래침을/타악 뱉고 해가 떨어져 더 이상 곧게 거닐 수 없는 계단을 오른다/후회가 현실을 따라 잡을 수 없듯이/슬픔이 세월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법/참을 수 없는 것은 어머니의 눈물….눈물….아아. 그/빌어먹을 눈물/끝내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가/흙이 되어서 바람에 날리면 나는 시러배. 얘야, 나를/일으켜다오 이젠 그 지저분한 열정이 너를 좀 먹을/것이니, 너는 돌아오는 혼돈의 모가지를 낚아 챌 수 있을까 (윤여문 ‘명상’, 1998년)

주말을 이용해 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예전에 써 놓았던 한 뭉치의 아주 오래된 글들을 우연히 찾았다. 먼지투성이의 파일 안에 누렇게 탈색된 원고지와 볼펜으로 휘갈겨 쓴 필기체의 글들을 보니 제법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보였다. 그 오래된 파일 안에는 1994년부터 모아두었던 꽤 많은 양의 시와 수필,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취객의 푸념 같은 글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 한켠에 쪼그려 앉아 꿈에서나 있었을 듯한 20여 년 전의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 상처, 고통, 절망, 후회 등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읽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내 젊은 시절은 그렇게 밝고 쾌활한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한동안 시인 이성복에 빠져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젊은 날의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 당시 김수영과 이상, 카프카와 니체의 문학적 색체를 좋아했던 나는 그들과 닮은 이성복의 시에 한껏 매료되었다. 이성복의 작품에는 묘한 비유법과 불규칙한 배열의 시행, 그리고 역설과 반어의 시어들이 난무한다. 당시의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손상된 가족관계와 잿빛 세상에 대한 시인의 적나라한 표현이었다. “오른팔을 못 쓰”고 “예고없이 해고”되는 무능력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는 등 가족에 대한 그의 표현은 이미 해체된 고통스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에 나는 주목한다. 또한, 그가 이해하는 세상은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버린 불완전한 대상이었고,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무기력한 대상으로 비춰진다. 이성복은 이러한 왜곡된 세상에서의 일상을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거나 “처녀는 양로원(養老院)으로 가”거나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돌덩이 같은 태아(胎兒)가 꺼내”어지는 기이함의 연속으로 표현한다.

1977년 등단 이후 한국 현대시에 혁명적이라 할 만큼 노골적이고 불쾌한 시 문법으로 평론가들을 놀라게 한 이성복의 시세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상처의 원인을 부드럽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전 작품에서 빈번히 사용된 불편하고 불경스런 표현보다는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사랑은 서러움이다”라는 식의 부드럽고 연약한 언어로 변모되었다. 최영미나 류시화의 달달한 시처럼 전통적 사회적 틀에 맞춰진 듯한 최근의 이성복 작품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식의 이성복 특유의 직설적이면서도 강렬한 시적 표현을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시인 이성복이 세상과 타협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고지식한 것일까.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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