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나라에 바치는 뜨거운 민족사랑 ‘충청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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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나라에 바치는 뜨거운 민족사랑 ‘충청정신’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5.2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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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1>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홍주의사총은 홍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병오항일의병들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해마다 5월 30일 순국의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을미사변·을사조약 의병봉기 촉발 1906년 민종식 주도 1000여명 결집
동학농민혁명 잇는 병오의병 항쟁 순국자 유골 해방 후에야 수습·안치
구백의총(九百義塚) 합장분묘 만들었다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바꿔

광복 70년을 맞는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표상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은 국가가 왜곡한 기억에 도전하는 것이며, 현재까지도 진행형인 독립운동, 민중운동, 민주화운동 등은 투쟁의 의의를 갖고 있다.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를 향한 것이며, 또 동시대인이면서도 밖에 있던 이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정당한 기억의 공동체를 확산해가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한 공동체가 확대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의 정리는 밖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관여했으며, 지금까지도 관련이 있거나 감당해야 하는 이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충남도청소재가 된 이곳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홍주 땅은 과거 평택에서 서천에 이르는 행정구역을 관할한 곳이기도 하다. 충청의 기맥(氣脈)인 금남북정맥(錦南北正脈)이 크고 작은 산을 펼쳐내며 서쪽으로 뻗어가고, 천리 물길의 금강이 산과 평야를 에두르고 품어내며 서해로 굽이쳐 흘러가는 여유와 풍요의 땅이다. 산과 강, 바다가 넉넉하고 풍요로운 조화를 이루는 충청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역사를 꽃피워 왔고, 빛나는 정신문화를 가꿔 왔다. 역사·문화의 본류인 고대 백제는 금강과 서해를 거점으로 동아시아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개방성과 진취성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 등과의 부단한 문화 교류를 통해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했다. 그 유산은 현대에서도 충청인의 역사·문화적 자산이 되고 있다. ‘산천이 평평하고 서울과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드는 곳’인 충청도, 특히 홍주 땅은 예로부터 나라의 동량과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돼 왔다. 조선시대 기호학파로 대표되는 기호유교문화권을 형성하며 충청정신의 뿌리인 충효정신, 선비정신, 예의정신을 발전시켜 왔다.

유교문화의 전통은 조선 후기 의병활동과 민족운동, 독립운동 등 현실 비판에 바탕을 둔 개혁정신으로 분출되기도 했다. 이처럼 호국충절·청렴결백의 전통과 양반문화의 예의를 숭상하는 충효·선비정신, 개방성과 진취성으로 대표되는 개척정신, 여유와 포용의 기품이 담긴 화해와 상생의 정신은 충청정신의 표상이면서도 홍주정신의 핵심이다. 이러한 충의정신은 미래 지향적인 가치까지도 함축하고 있으며, 이는 곧 우리들에게 던지는 보편적 시대정신인 것이다.

우리는 광복 7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수많은 외침을 슬기롭게 극복했지만,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 지배를 받은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있다.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일제의 철저하고 무자비한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로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자행되던 1919년 3월 1일 고종의 독살설에 맞춰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가장 괄목할 만한 역사적 의거이다. 그 중심에는 특히 충절의 고장 충청도가 있었다. 충청도 대전에서 태어난 박팽년 선생은 이 불의한 사건에 대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충청도 홍주 출신의 성삼문 선생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펼친 사육신의 핵심이다. 또 홍주의 김좌진 장군은 15살의 어린 나이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해방하고, 종문서를 불살랐다. 그들에게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준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 3000명을 사살하는 등 온몸을 불살라 조국독립에 바쳤다. 동시에 단재 신채호 선생, 유관순 열사, 이동녕 선생, 유석 조병옥 박사, 유인석 선생,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만해 한용운 선사와 의암 손병희 선생 등등 수없이 많은 애국열사, 독립운동가들이 충청도 출신이었다. 아산의 수당 이남규 선생은 구한말 충신이요, 대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 후손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스승이었다. 을사늑약 후 1907년 그의 자제와 함께 일경에 의해 손과 발이 잘리고 마침내 목까지 잘리는 참화를 당하면서도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 가문의 이승복 선생은 신간회의 핵심 인사로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관여한 독립투사였고, 수당 선생의 증손자 이장원 중위는 6·25 한국전쟁 당시 입대, 참전하여 전장에서 순국했다. 이들이 모두 충청도 홍주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충청도는 이런 곳이다. 흔히 충청도란 말이 충주와 청주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지명의 결합만으로는 충청도의 뜻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나라를 위한 충(忠)과 맑고 깨끗한 기풍의 청(淸)을 우리는 항시 기억하고 명심해야 한다. 충청도의 정신과 기백이 민족정기를 이루고, 정의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지역으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현충사와 칠백의총, 국립현충원과 독립기념관이 충청도에 있다는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한편 충청도 홍주 땅에는 900명 이상의 민족혼이 묻혀 있는 홍주의사총이 있다. 홍주의사총은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로, 홍성읍 대교리의 남향 바른 언덕을 가슴으로 안은 채 자리하고 있다. 흔히 충청인은 행동이 느리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먹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뚝심 있게 곧바로 밀고 나가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충청도에는 성삼문과 박팽년 등 사육신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 김좌진, 윤봉길, 손병희, 한용운, 유관순 등 충신열사가 많이 배출됐다. 이들의 충절·충의정신은 충청인의 정신으로 면면히 계승돼 일제의 침략 당시에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한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을 통해 적극적인 행동을 실천했던 것이다.

 

홍주의병기념탑의 홍주의병을 상징한 조형물.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 해인 1906년 3월 홍주와 청양 등 충청도 내포지역의 유생들은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홍주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5월 20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경찰과 관군의 공격을 물리치며 위세를 떨쳤던 것이다. 그러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보병 제60연대를 출동시켜 홍주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일본군은 5월 31일 새벽에 동문인 조양문을 폭파하고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했다. 이에 홍주의병은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결사적으로 대항했지만 의병들은 북문까지 폭파하고 밀려들어오는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면서 방어했다. 하지만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홍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아픔의 역사는 해방 후인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 박주철과 홍성경찰서장 박헌교가 직원들과 현재의 홍주의사총 부근에서 나무를 심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하게 됐다. 이들은 당시 홍주관아에 근무했던 생존자들과 마을 주민들에게 확인한 결과, 이곳이 동학농민운동을 잇는 병오 항일의병들의 사체를 임시로 매장한 곳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흩어져 있던 유골 열다섯 바지개 분량을 수습했고, 상투머리에 꽂는 동곳도 3되 정도 발견됐다고 한다. 이는 주로 선비들의 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이곳에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하여 합장분묘를 만들었다가 1992년 구백의총을 ‘홍주의사총’으로 바꾸고, 매년 5월 30일 열한시에 순국의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홍주의사총은 1973년에 지방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으며, 2001년 8월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31호로 지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김은자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아직도 홍주 땅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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