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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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 수는 없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8.2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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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7>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방산저수지 아래 야트막한 산을 병풍삼아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선생 고택과 수당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말기 일제침략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며, 홍주의병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일제의 회유에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꼿꼿했던 선비. 대술면 상항리를 향하면서 뇌리를 스치는 것은 충청도 땅 구석구석이야말로 진정 충절의 땅, 그 흔적들로 덮여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충청도 땅 어느 곳이든 향하는 발길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선조들의 절의정신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충청인으로서 보람이며 긍지다. 혼란스러운 지금의 현실이기에 충청도 땅과 충청인의 정신이 더욱 그리운 때이다. 고향인 예산과 순절한 땅 아산시 송악 땅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으면서 수당 이남규 선생의 이름이 모처럼 고향땅의 길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광복 70주년이 주제만이 아니라 늘 변함없는 이 나라 민족의 의식으로 올곧게 승화되어 계승되어야 할 정신이다. “불의로 존재함은 의로움에 망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불의로 사는 것은 의로움에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물며 의가 틀림없이 망했는데도 죽지 않고, 불의가 틀림없이 존재하는데도 죽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매국 무리들의 죄를 다스리시고, 원수의 나라(일제)가 맹약을 어긴 죄를 동맹 각국에 포고하고, 군신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일제와) 일대 결전을 벌이게 하여 주십시오.”(을사늑약 직후 올린 수당 이남규 선생의 ‘청토적소’ 중에서)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수당 고택 옆에 있는 수당기념관.

수당 이남규 가문, 충규·승복·장원 4대가 현충원에 안장
을사조약, 국권이 상실된 민족의 위기에 홍주의병에 참여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에 의병투쟁을 통한 민족운동 전개
일제의 타협요구를 물리치고 순국한 조선조 선비의 표본

1대 수당 이남규(1855~1907).

수당 이남규 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에서 부친 호직과 모친 청송 심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한산, 자는 원팔, 호는 수당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동부도사를 역임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집안은 고려조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조선조 이산해와 이경전 등 이름 높은 재상을 배출한 유가의 명문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학문의 전통이 매우 깊었다. 선생 또한 후손들에게 ‘문장에 대한 연원을 다른 곳에서 구할 것 없이 가학에서 구하여야 한다’고 할 정도로 가전의 학문에 대해 강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전통 가학을 익히면서 선생은 7세부터 당시 기호유림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성재의 학문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성호 이익과 안정복의 학풍을 잇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의 학문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도, 공리공담에 빠진 공허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이 배어있는 실학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의 투철한 현실인식과 위정척사적 민족의식은 바로 이 시기 배양된 것이고, 이후 외세 및 일제의 침략을 경험하면서 더욱 심화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수당 이남규 선생은 고려 말의 충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이자 단재 신채호선생의 스승이었다. 수당은 고종 19년에 문과급제 후 궁내부특진관,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급에 해당하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이자 고종의 최측근이었다. 1893년 일본의 조선 내정 간섭,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1905년에는 을사조약 체결 등이 일어나자 수당 이남규는 그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고종에게 일제와의 결전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이남규 선생은 1907년 9월 26일 현재의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일제에게 피살돼 자신의 아들 이충구, 하인 김응길과 함께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다섯 손가락을 찾지 못할 만큼 모두 잘려 땅에 떨어졌다. 충구는 부친을 보호하려 했지만 끝내 부자는 함께 일본헌병의 칼에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가마를 메던 하인 김응길(金應吉)도 이에 격분해 가마의 막대기를 뽑아 일본 헌병을 때려죽였지만 그 역시 적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충신과 효자, 충노(忠奴)가 한꺼번에 순절했다며 칭송했다. 왜 그렇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는가. 단순히 배일사상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다는 이유만이 그의 죽음을 설명 할 수 있을까. 그 자리에는 지금 민가 한 채와 함께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의 땅’이라는 비석이 취지문과 함께 말없이 서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오늘의 후손들에게 무언 속에 역사적인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수당 선생의 의식과 정신의 흔적 앞에 광복 70주년이 또 지나가고 있다.

2대 유재 이충구(1874~1907).

수당 선생의 장남인 유재(唯齋) 이충구(李忠求; 1874~ 1907) 선생은 부친을 도와 홍주의병 활동에 참여했다가 거듭되는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부친을 군도로 내리치는 일본 헌병에 저항하다 결국 부친과 함께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수당 선생에겐 순국선열로서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유재 선생에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3대 평주 이승복(1895~1978).

수당 선생의 손자이자 유재 선생의 장남인 평주(平洲) 이승복(李昇馥; 1895∼1978) 선생 역시 국내외에서 펼쳐진 굵직한 독립운동마다 이름을 올린 애국지사다. 평주 선생은 1913∼19년 러시아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독립지사인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1920년엔 박은식과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 활자를 연해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체포돼 6개월간 구금당했다. 같은 해 7월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용만, 이민복, 조성환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을 지원하려고 김병희와 함께 귀국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폈다. 정부는 평주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4대 이장원(1929~1951).

이장원(李章遠; 1929~1951) 소위도 6·25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장교로 참전해 작전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었다. 미혼이었던 이 소위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 사관후보생 5기로 자원입대해 같은 해 9월 소위로 임관한 뒤 중요한 작전들에 참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1952년 1계급 특진과 함께 1953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현재 수당, 유재, 평주 선생 3대는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 225, 226, 227호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4대인 이장원 소위는 국가유공자로서 국립서울현충원 19묘역 4판 60331호에 안장돼 있다. 또한 수당, 유재 선생과 함께 일본 헌병의 만행에 저항하다 함께 참변을 당해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하인 김응길 선생도 애국지사 3대의 묘역 바로 곁에 안장됐다.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을 아꼈던 수당 선생을 본받아 매년 김응길 선생의 제사를 수당 선생과 같은 날에 올린다는 것이 수당 선생의 증손자인 수당기념관 이문원(78·중앙대 명예교수) 관장의 설명이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내기도 한 이 관장은 “증조부인 수당 선생이 장남이셨는데, 조부도 선친도 다 장남이셨고, 형님인 이장원 소위까지도. 그러나 단 한 번도 조상들을 원망한 적은 없어. 수당 선생은 신채호 선생과 변영만 선생을 애제자로 둘 만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난 스승이셨고, 한마디로 항일운동의 상징이셨지. 난 그것이 당시 인(仁)과 의(義)를 무엇보다 숭상한 유학의 전통을 받든 애국 관료로서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거라 생각해. 나라가 어려울 때 식자(識者)층이 개인의 행복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그게 대를 이어 나라 사랑을 가능케 한 정신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해. 생명을 바친다는 건 결코 연습할 수 없는 일이잖아.”라며 “지난 2010년 4월 예산의 선산에 모시던 조상들 묘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지. 현충원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한데 모신 민족의 성지이니 개인 선산에 모시는 것보단 더 뜻 깊을 테고, 조상님들도 아시는 분 만나면 심심치 않으실 거 아냐?”

수당 고택 옆 수당기념관의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이란 수당 선생의 글귀는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으려던 일본 헌병들에게 외친 최후의 호통이었으리라. 이남규 선생은 애민론에 입각하여 목민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동학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이유 있는 항거를 이해하려 했으며, 정부의 사후 처리에 대한 잘못도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지방관으로 임지에 나가서는 민생의 향상과 고통을 덜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남규 선생은 ‘의(義)’정신에 투철했으며, 비록 나라가 망할지라도 민족이 떳떳한 길로 들어선다면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오직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는 대로 처신하였으며, 일제의 타협요구를 물리치고 순국한 조선조 선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당의 철저한 역사의식에서 우리는 과거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통하여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의 좌표를 설정하는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곧은 역사의 바로세우기가 아닐까.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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