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핀 순절의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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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핀 순절의 꽃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6.0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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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2>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충절과 충의의 고장이라 불리는 충청도, 특히 옛 홍주목사 고을에는 충신, 열사 등이 많이 배출됐다.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충청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재조명함으로써 이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서 우리고장의 역사인물이 차지하는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의 생명과 재산까지 내놓으며 조국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존경받는 사회,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반듯한 사회가 절실히 필요한 오늘이기 때문이다. 지금,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의 삶은 가혹하리만큼 어려운데, 친일인사들은 호가호위하는 현실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지 모습.

조국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이 존경받는 사회돼야
지금,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가혹하리만큼 어려워
충청·홍주출신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상 재조명해야

국가의 무성의한 정책으로 그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명심할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를 빛낸 위인들이 충청도 땅에서 일궈낸 역사적 흔적들은 현대인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위인들의 발자취, 특히 항일 독립운동 전체가 하나의 맥락에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 개인을 기리는데 치우치다보니, 실질적으로 가치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임시정부 활동 기간까지 만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독립운동의 실체와 흐름을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시대정신으로 ‘선비정신’을 꼽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비’하면 대쪽처럼 곧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직언과 상소를 올리는 엄청난 용기와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선비다. 사회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비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근현대기 학생운동 등에 그대로 계승됐다. 예로부터 비롯된 선비정신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필요한 선비정신은 무엇일까. 충청도 땅과 홍주 땅의 역사위인들의 삶과 활동을 통해 정신사적 의미와 가치 등을 담아내야 한다.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모습.

일본이 강력한 제국주의를 통해 한반도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도 불교계에서는 만해 한용운이 나타나 독립운동의 한축을 담당했다. 비록 김좌진이나 윤봉길처럼 일본군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한용운은 겨레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독립운동가들에게 힘을 보냈다. 우리 역사에서 충청도는 수많은 충신과 열사, 효자를 배출한 충절과 충효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차령산맥 너머 충청도 서해안의 최대도시로서 조선시대 청주, 충주, 공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도시 중 하나였던 홍주(지금의 홍성)지방은 많은 역사유적과 함께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고을로 손꼽힌다. 홍주고을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펼친 대표적 인물로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다. 김좌진 장군(1889∼1930)은 1911년과 1915년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투옥됐다. 그는 1917년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펼쳤다. 특히 청산리대첩은 일제강점기에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 전투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록에 따르면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여 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기념물 제76호인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번지)가 있다. 김좌진 장군 생가 앞길을 따라 결성농요농사박물관 방면으로 내려가면 만해 한용운 선사(1879∼1944)의 생가(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가 있다. 이곳에는 만해의 문학과 철학을 반영하는 유물 60여 점이 전시된 만해문학체험관이 있다. 만해는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고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으로 활동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후 불교의 대중화, 독립사상 고취, 문학 활동을 펼치다가 1944년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심우장을 지을 때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향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매헌 윤봉길 의사 생가지 모습.

또한 인근의 홍주골 덕산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가가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예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과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아호는 매헌(梅軒)으로 봉길은 별명이었다. 그는 백부인 윤경(尹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수학하다가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고자 학교를 자퇴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의거로 체포돼 1932년 5월 25일 일본군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시 교외인 미츠코지(三小牛)산 육군작업장에서 총살이 집행됐다. 유해는 납관돼 가나자와시 노다산(野田山) 육군묘지에 인접한 공동묘지의 한 구석에 암매장됐다가 1946년 김구의 지시에 의해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사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민중들이 충절과 충효정신을 내걸고 거세게 저항하며 순절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오랜 전통인 셈이다.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성웅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를 비롯해 금산의 칠백의총, 홍주의 구백의사총에서 볼 수 있듯 1906년(병오년)에는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홍주성을 점령한 뒤 그 탈환에 나선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무명용사들의 항일유적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운이 기울던 한말이후 광복까지 반세기 동안 벌인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은 1894년 일제의 야망이 노골화 되자 이에 저항하는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점점 조직화되고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벌인 을미사변과 친일내각의 을미개혁에 백성들은 더욱 저항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은 충청도와 충청도 사람들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충의정신을 실천한 대표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이유다.

역사는 스스로 고찰하고 사색하면서 사고할 때 그나마 올바른 역사의 정의가 바로설 수 있다. 우리의 역사는 왜곡된 기록으로 편집되면서 정신의 본질과 의식조차 질식해 버린 슬픈 자화상으로 다가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를 극복해 보기 위한 일환으로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우리지역 독립투사와 열사들의 발자취를 통해 그들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일제 강점기 중국을 무대로 펼쳤던 항일독립투사들의 역사적 삶의 가치를 통해 충청과 홍주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활동상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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