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유지명 ‘홍주(洪州)’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빼앗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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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유지명 ‘홍주(洪州)’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빼앗겨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7.3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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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⑤

우리의 역사가 왜곡된 것은 기정사실인데 그중에서도 지명에 관한 것이 그 단초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사람의 이름에는 명분이 있고 지명의 뒤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부르는 지명 역시 다양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 깊은 뜻, 재미있고 해학적인 뜻, 슬픈 뜻 등 역사와 문화가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일제는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이른바 창씨개명 (創氏改名)이라 해서 한국인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고유지명(地名)도 마음대로 일본식으로 고쳐 버렸다. 그런데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식 인명(人名)은 본래 이름으로 되돌려졌으나 일제가 남긴 일본식 지명은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본래 이름을 되찾지 못한 채 전국의 곳곳에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

홍주(洪州)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계도관(界道官)중 하나였다
충주·청주·공주와 충청도의 4목(牧)중 하나로 주(州)자 못 찾아
왜구의 침입 방어 위해 문종 원년(1451) 홍주성(洪州城) 구축해
홍주(洪州)는 호서의 거읍(巨邑) 땅이 넓고 기름져 백성이 번성

홍성지역은 먼 옛날 하늘나라에 있던 큰북이 땅으로 떨어질 때 둥글고 넓게 움푹 패인 천고낙지(天鼓落地)의 분지라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하늘의 북이 지상으로 떨어졌으니, 외침을 막기에는 더 없이 좋은 땅이라고 한다. 동쪽으로 예산군과 경계를 이루는 봉수산(일명 대흥산)을 시작으로 북쪽으로 아미산(峨嵋山, 매봉재라고도 함)·용봉산(龍鳳山, 374m)·삼준산(三峻山, 三尊山이라고도 함)·봉수산(烽燧山)이 휘어 감고, 남쪽으로는 오서산(烏棲山, 799m)·지기산·석당산(石堂山)등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지형이다. 지금의 홍성지역은 삼한시대에 마한의 감계비리국이 있던 곳으로써 백제시대에는 고막부리 현이 있었으나, 좀 더 자세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고려 왕건은 934년 운주(지금의 홍성)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충남의 서북부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여세를 몰아 936년 경북 선산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후 고려 성종 14년(995)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성 할 때 이곳 홍성지역을 운주라 하고, 현종 3년(1012) 개편 때 ‘홍주(洪州)’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여 조선조까지 같은 지명으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홍주군은 ‘결성현(結城縣, 지금의 결성면)’의 11개 면을 병합하면서 홍주군의 ‘홍(洪)’자와 결성현의 ‘성(城)’자를 따서 ‘홍성(洪城)’이란 새 이름을 갖게 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홍주(洪州)’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차례 충청도명이 충공도, 청홍도, 홍청도 등으로 변경하는 계도관(界道官)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계도관이란 지방통치조직을 편성할 때 각 고을마다 진산(鎭山)을 지정하고, 성리학의 나라로서 문묘(향교 소재)·사직단·성황사·여단 등 1묘(一廟)·1사(一祠)·2단(二壇)을 설립하여 잡다한 민간신앙은 음사라 하여 금지하면서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격을 3등분하여 지방행정의 수장인 수령이 주재하는 전패(殿牌)를 모시도록 하는 기준 도시를 말한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조선은 중국 명의 제도를 도입하여 외방(外方) 향교는 각 계도관 -주·부·군-현 등 읍격을 3등분하고, 계도관에는 서울의 성균관과 동일한 문묘체계를 갖추고, 주·군에는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10철(十哲)·송유4현(宋儒四賢) 및 당시까지 숭무된 동방유현을 향사케 하고, 현에는 주·군과 달리 10철을 제외시켰다. 이렇게 충주·청주·공주와 함께 조선시대 충청도의 4목(牧)중 하나이던 홍주(洪州)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조선 문종 원년(1451)에 홍주성((洪州城)을 쌓았는데, 그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1.5㎞), 높이 11척(약 3.3m)이었다. 홍주성에는 조양문(동문; 朝陽門), 경의문(서문; 景義門), 홍예문(남문; 洪霓門), 망화문(북문; 望華門) 등 4개의 성문이 있고, 성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여 지금은 동문인 조양문만 남았다. 지난 해(2014년) 사업비 15억 원을 투입해 홍주성 남문을 복원했다. 남문 복원사업은 문루 약 40㎡, 여장 55m를 복원했으며, 소광장 346㎡, 남문진입로 122m, 배수로 석축 정비 등이 함께 진행됐다. 홍성군은 지난 2009년과 2010년 남문 터 발굴조사를 벌여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존재했음을 확인됐다고 밝힌바 있다. 2011년 실시설계를 완료하고 2012년 11월부터 복원공사에 착수, 2년 만에 준공, 동문인 조양문과 함께 남문이 복원돼 4문 중 2문이 제자리를 찾게 됐다. 남문의 명칭이 기존에 알려진 ‘홍예문(洪霓門)’ 형태가 아니라 발굴조사 결과 기초석이 확인되면서 지역향토사연구가, 관련 학자 등을 통해 자문과 설문과정을 통해 ‘홍화문(洪化門)’으로 현판을 결정했다고 군청의 관계자는 밝혔다.

 

신동국여지승람.

지금도 홍성에는 ‘홍주’라는 지명의 흔적이 남아 있거나 사용되고 있다. 홍주성, 홍주아문을 비롯하여 홍주초등학교, 홍주고등학교, 홍주문화회관, 홍주종합경기장, 홍주체육문화센터 등 각종 명칭으로 1000년의 역사와 문화, 삶속에서 오롯이 살아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1012년부터 지금까지 ‘홍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 공교롭게도 충남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해 오는 2012년에는 1000년을 맞이했다는 점은 큰 의미다. 홍성군에서는 행정지명으로 정식으로 사용된 년도를 1018년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렇듯 지명의 역사가 1000년 이상을 올곧이 이어오는 지역도 드물다.

 

여지승람.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홍성의 옛 이름은 ‘홍주’였다. 홍주와 공주의 일본식 발음이 비슷해서 ‘홍주’를 ‘홍성’으로 바꿨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홍주의병 등 그 어느 지역보다 항일의식이 높았던 지역의 특성을 희석시키고자 일제가 지명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 홍주는 고려시대부터 서해안권의 행정·교통의 중심지로서 번성했으며, 고종 32년인 1895년에는 현재의 평택부터 서천에 이르는 22개 군현을 관할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서는 “홍주는 호서의 거읍(巨邑)이고 그 땅이 넓고 기름지며, 그 백성이 번성하여 난치(難治)의 고을로 불려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홍성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차례 충청도명이 충공도, 청홍도, 홍청도 등으로 변경하는 계도관(界道官)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계도관이란 지방통치조직을 편성할 때 각 고을마다 진산(鎭山)을 지정하고, 성리학의 나라로서 문묘(향교 소재)·사직단·성황사·여단 등 1묘(一廟)·1사(一祠)·2단(二壇)을 설립하여 잡다한 민간신앙은 음사라 하여 금지하면서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격을 3등분하여 지방행정의 수장인 수령이 주재하는 전패(殿牌)를 모시도록 하는 기준 도시를 말하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조선은 중국 명의 제도를 도입하여 외방(外方) 향교는 각 계도관-주·부·군-현 등 읍격을 3등분하고, 계도관에는 서울의 성균관과 동일한 문묘체계를 갖추고, 주·군에는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10철(十哲)·송유4현(宋儒四賢) 및 당시까지 숭무된 동방유현을 향사케 하고, 현에는 주·군과 달리 10철을 제외시켰다. 아무튼 ‘홍주(洪州)’라는 홍성의 옛 고유 지명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일본식으로 변경된 이래 전국의 옛 목사고을 중 유일하게 고유지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역이다. 토박이 땅이름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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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 긍준에 ‘홍(洪)’씨 성 하사, 지명 ‘홍주(洪州)’?
‘운주(運州)’지명 고려 건국한 918년 기록에 처음 등장
고려시대 운주의 탄생과 ‘홍주’지명사용 이유 있었네
홍성, 옛 목사고을 고유지명 ‘홍주’를 찾지 못한 유일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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