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내포지역 중심고을은 홍주목(洪州牧)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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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포지역 중심고을은 홍주목(洪州牧)이었다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10.2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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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⑪

 

▲ 조선시대 동국8도지도 충청도.


1895년 제도개정, 홍주목이 홍주군(洪州郡)되기까지 정3품 목사 파견
조선시대 홍주목(洪州牧) 고을명은 일시적으로 충청도 도명으로 사용
홍주(洪州)의 고을명이 충청도 도명에 반영된 것은 명종 4년 이후 9번
홍주(洪州) 행정중심지 부각, 조선시대 충청도 4목(충주·청주·공주·홍주)

홍주(洪州)는 공민왕 7년(1358)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되었다가, 공민왕 17년(1368)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고, 공민왕 20년(1371) 다시 목이 되었다. 조선시대 충청도는 차령(車嶺)산맥을 경계로 2개의 권역으로 나뉘었다. 차령의 산줄기에 의하여 권역이 구별되는데, 동남부는 공주(公州)가 중심지였고, 서북부는 홍주(洪州)가 중심지였다. 고려 말 공민왕대 마련된 ‘홍주목’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유구한 역사의 터전으로 충청도 서부지역 지방행정의 중심지, 서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 역사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한말·일제 강점기에는 위정척사사상의 발원지, 의병 투쟁과 무장항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태조 4년(1395)에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양주(楊州), 광주(廣州) 관할의 군·현(郡·縣)을 양광도에서 갈라 경기(京畿)에 옮겨 붙이게 되자, 충청지역은 더 이상 양광도라는 도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충청도로 개칭되었다. 이후 홍주는 충청도의 4목(충주․청주․공주․홍주)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양광도라는 도명이 사용되던 태조 2년(1393)에 전국 각도의 계수관을 정할 때, 양광도의 계수관은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수원(水原)이었으므로 홍주(洪州)는 계수관에 해당하지 않았다. 이후 홍주(洪州)가 충청도의 계수관에 포함된 시기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태종 8년(1408)에 여양현(驪陽縣)을 홍주(洪州)에 합치고 비로소 판관을 설치한 것은 아마 계수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태종 13년(1413)에 고을 명칭의 일제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정3품 품계의 목사가 수령으로 파견되는 큰 고을에만 지명에 ‘주(州)’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홍주(洪州)는 조선시기를 거쳐 충청도 4목(충주·청주·공주·홍주)으로서의 위상을 견지하면서 행정적·군사적으로 충청서부지역을 대표하는 고을이었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홍주(洪州)지역에서 몇 차례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하여 홍주목(洪州牧)이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복구되는 과정을 겪었다. 최초의 강등은 현종 2년(1661)이었다. 이유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殿牌-일명 어패)가 변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현종대에 특히 전패의 변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 간악한 백성이 수령을 쫓아내기 위한 계책으로 보고, 그 고을은 강등시키되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홍주(洪州)의 경우 전패의 변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발생한 것인지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다른 지역에서 백성이 전패를 몰래 훔쳐가는 예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효종조부터 사용되던 충홍도(忠洪道=충주+홍주)라는 도명도 충공도(忠公道=충주+공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명의 개호와 읍격의 강등은 재지세력을 견제하고 지방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방통치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강읍호된 고을의 복호기간은 선조대까지는 대신들의 수의(收議=정리하고 의논하는 일)에 의해 결정되었으나, 광해군 이후에는 대체로 10년을 처벌기한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강등된 홍양현(洪陽縣)도 10년이 지난 현종 11년(1670)에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주목(洪州牧)은 숙종 36년(1710)에 다시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되었는데, 육친을 살해한 강상죄(綱常罪)를 지은 삼성죄인(三省罪人)이 태어난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이때에도 10년이 지난 숙종 45년(1719)에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당시 홍양현감 이정제(李廷濟)는 일찍이 3품을 거쳤기 때문에 그대로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승부(陞付=진급하여 오르다)되었다.

홍주목(洪州牧)은 경종 2년(1722)에 역모정형죄인(逆謀正刑罪人) 성절(盛節)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다시 한 번 홍양현(洪陽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영조 8년(1732)에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영조 8년에 홍양현(洪陽縣)을 홍주목(洪州牧)으로 쉽게 승격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흉년이 든 상태에서 현감을 목사로 교체시켰을 때 나타날 영송의 폐단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득이 고을은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송의 폐단을 막기 위하여 수령은 신진 6품관인 홍양현감 윤경룡을 그대로 정3품인 홍주목사에 제수하였다. 이후에는 1895년의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홍주목(洪州牧)이 홍주군(洪州郡)이 되기까지 홍주에는 정3품 목사가 수령으로 파견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홍주목(洪州牧) 고을명은 일시적으로 충청도 도명에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충청도의 도명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충청도(忠淸道)라는 명칭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충주·청주의 고을이 강등되면 일시적으로 공주·홍주 등의 머리글자를 도명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충청도는 충주·청주·공주·홍주(忠州·淸州·公州·洪州) 등 계수관 고을의 승강에 따른 일시적인 개호가 8도 가운데 가장 자주 있었다. 충청도라는 명칭 외에 조선전기에는 충공도(忠公道), 청공도(淸公道), 청홍도(淸洪道=청주+홍주)라는 도명이 사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충홍도(忠洪道=충주+홍주), 공홍도(公洪道=공주+홍주), 공청도(公淸道=공주+청주), 홍청도(洪淸道=홍주+청주), 충공도(忠公道=충주+공주), 홍충도(洪忠道=홍주+충주) 등의 도명이 사용되었다. 홍주(洪州)의 고을명이 충청도 도명에 반영된 것은 명종 4년(1549)의 청홍도(淸洪道), 광해군 3년(1611)의 충홍도(忠洪道), 광해군 5년(1613)의 공홍도(公洪道), 인조 24년(1646)의 홍청도(洪淸道), 효종 9년(1658)의 충홍도(忠洪道), 숙종 7년(1681)의 공홍도(公洪道), 숙종 15년(1689)의 홍충도(忠洪道), 영조 15년(1739)의 공홍도(公洪道), 정조 2년(1778)의 홍충도(洪忠道) 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포지역의 중심고을은 홍주목(洪州牧)이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홍주목사가 내포의 다른 고을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조선초기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홍주목이 거느린 소령(所領=거느리고 있는 땅) 군현은 태안군, 서산군, 면천군, 해미현, 당진현, 덕산현, 예산현, 청양현, 보령현, 결성현, 대흥현 등 11고을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도제가 완전히 정착되기 전인 과도기적 성격의 반영이었다. 조선시대의 8도제 하에서는 각 고을의 수령들은 고을의 위격에 관계 없이 모두 충청도관찰사의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즉 충청도에 파견된 관찰사가 도내 모든 고을을 관할하면서, 외관들을 부폄(襃貶=높이거나 낮춰 폄하)하고 있었고, 고을에 파견된 수령 상호간에는 행정적으로 상하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병렬적인 관계였다.

조선시대 충청도 지역은 시기에 따라 다소 변동은 있었으나, 대체로 54고을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 각 고을에 목민관을 비롯한 외관이 파견되고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충주·청주·공주·홍주(忠州·淸州·公州·洪州)의 4고을에 목사․판관․교수가 파견되고 있었다. 임천·단양·청풍․태안·한산·서천·면천·천안·서산·괴산·옥천·온양 등 12고을에는 군수와 훈도가 파견되었으며, 문의에는 현령과 훈도가 파견되고, 그밖에 37고을에는 현감과 훈도가 파견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내포지역에는 홍주목에 목사와 판관·교수, 서천·서산·태안·면천·온양 등에 군수와 훈도, 그 외 14고을에 현감과 훈도가 파견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홍주목(洪州牧)에 홍주목사, 전영장, 찰방 등의 외관이 파견되고 있었다. 전기의 외관 가운데 향교의 교관직은 조선전기부터 적임자의 확보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어서 후기에는 혁파되었다. 보완책으로 선조 19년(1586)부터 명나라제도를 모방하여 한때 계수관에 제독관을 파견하여 주변고을의 향교를 함께 관할토록 한 적이 있었다. 내포지역의 고을인 홍주목(洪州牧)에도 한때 제독관이 파견되었는데, 광해군 원년(1609)의 제독관으로 신정의(辛廷懿)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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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옛 목사고을 고유지명 ‘홍주’를 찾지 못한 유일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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