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재위 918~943년 홍주(洪州) 이름 탄생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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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재위 918~943년 홍주(洪州) 이름 탄생 추정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8.1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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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⑦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고려 초부터 등장한다. ‘홍주(洪州)’라는 이름은 ‘운주(運州)’라는 지명의 뒤를 이어 나오는 이름이다. 운주나 홍주라는 이름 역시 고려초에 등장한 이래 성종 14년(995)의 지방제도 실시에 의하여 도단련사(都團鍊使)를 파견함으로써 공식적인 행정구역 명칭으로 지위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운주(運州)’라는 지명은 고려가 건국한 서기 918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고려사’ 태조 원년 8월의 기록에 “웅주, 운주 등 10여 주현이 배반하여 견훤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는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운주(運州)’라는 지명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운주라는 지명이름이 불린 배경으로는 당시의 호족세력인 성주 ‘긍준(兢俊)’의 군사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운주라는 지명은 기존에 사용되어 오다가 고려의 태조 왕건이 긍준의 귀부에 따라 긍준의 귀부를 공인하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주’라는 이름의 탄생은 고려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운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홍주’가 선택되면서 새로운 주(州)를 성립했다는 의미로 작용했다는 측면이 강하다. 홍주라는 이름도 운주라는 이름이 사용되던 시기에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충청도의 옛 지도(왼쪽)와 조선팔도지도,1785,남가주대 소장.

홍주(洪州)의 개조(開祖), 운주성주 긍준=홍규는 동일 인물
태조 왕건의 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은 홍주(洪州)출신
홍주홍씨(洪州 洪氏) 시조(始祖)인 홍규(洪規)의 딸이 왕비
홍주(洪州)라는 지명 탄생 왕건의 재위기간과 맞물려 있다

운주성주 긍준이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대가로 주(州)가 되었을 것이고, 기존에 사용되고 있던 ‘운주’를 태조 왕건이 긍준에게 새로운 지명으로 ‘홍주(洪州)’를 하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태조 10년(928) 이후의 시점일 것이고, 이는 고려 ‘태조실록’에 태조가 ‘운주에 입성했다’는 기록의 표현이 나타나는 것을 감안할 때, 기존에 사용되고 있던 ‘운주’를 태조 10년 이후 태조가 진입하면서 새로운 이름인 ‘홍주(洪州)’라고 내린 이름이라고 조정되고 있다. 운주가 홍주로 바뀐 정확한 시기(연도)는 알 수 없지만 ‘고려사’에 현종 3년(1012)의 관직이 도단련사에서 지주사로 개편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지리지에 “뒤에 지금의 이름(홍주)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그럼 과연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의 문제다. 분명한 것은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운주시대는 1세기로 마감되고 ‘홍주’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이다. 우선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큰 고을’에 붙이는 문자적 의미를 갖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국보 제248호 조선방역지도.

고려 제1대왕 태조의 왕비(제6후궁)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을 배출한 홍규(洪規=긍준)의 성씨와 같은 홍(洪)자이며, 홍주홍씨(洪州洪氏)라 명명한 것에 주목할 대목이다. 당시 홍규(洪規)는 태조 이래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을 상징하는 의미이며, 왕비를 배출한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영향력이 함께 뒷받침 되면서 11세기 초, ‘운주’를 ‘홍주(洪州)’라는 이름으로 바꿨다는 추론에 설득력이 실리는 대목이다. 주목되는 것은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 洪氏, 생몰년 미상)는 고려의 초대 왕 태조 왕건의 제12비이다. 여기서 본관을 ‘홍주(洪州)’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결국 홍복원부인은 홍주(洪州) 출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始祖)이기도 한 홍규(洪規)의 딸이기 때문이다. 홍규의 원래 이름은 긍준(兢俊)으로, 운주성주(運州城主)를 지냈던 인물이다. 운주는 홍주의 옛 이름이다. 927년(태조 10년) 음력 3월 태조 왕건은 운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때 운주성주였던 긍준은 자신의 딸을 바쳤으니 그녀가 곧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었다. 그밖에도 당시 운주(홍주)는 중국 사신들의 입출항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곳이기도 하였다.

‘고려사’ 등에는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의 출신이 ‘홍주(洪州)’출신이라는 것과 소생 말고는 자세한 생애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며, 호를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라 기록하고 있다. 남편 태조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태자 직(太子 稷)이며, 후손은 없었다. 딸의 이름이나 호는 전하지 않으며, 단지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소생의 장남 태자 태(太子 泰)에게 시집을 갔다는 기록만 있다. 훗날 왕위를 신명순성왕후의 차남(정종)과 3남(광종)이 각각 이은 것으로 볼 때, 태자 태는 요절한 듯하다. 이렇듯 태조 왕건의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와의 혼인도 바로 홍주(洪州)의 새력과의 연대를 의도한 정략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당시에는 홍주(洪州)의 완전한 확보야말로 후백제에 대한 전략상 매우 중요한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이 홍주(洪州)를 고려의 세력으로 넣음으로써, 홍주(洪州)는 고려 왕실과 각별한 연고를 형성하게 됐고 홍주(洪州)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결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고려군읍도(19세기).

태조 왕건이 홍주(洪州) 출신인 홍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을 보면, 홍규 역시 홍주의 유력한 호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홍주(洪州)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호족출신인 ‘운주성주 긍준’은 태조의 장인이 된 홍규(洪規)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일이다. 태조 왕건에게 딸을 혼인시켜 장인이 되면서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始祖)가 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가 홍규의 딸로 왕건의 왕비가 되었듯이 고려 초 공신들 중 주요 인물들은 나중에 성을 갖고 개명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왕건을 태조로 옹립한 개국 1등 공신 4명도 그랬다. 이처럼 개명을 하는 것은 원래 신분이 높지 못하여 성씨를 갖지 않았다가 벼슬이 높아지면서 성을 갖추게 되고 개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국 공신 4인방 중 홍유의 경우 자신의 딸을 태조의 비(의성부원부인)로 들인바 있다. 홍규(洪規)의 경우도 딸을 왕비로 드리면서, 홍주(洪州)는 고려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홍규(洪規)는 왕건의 유력한 특별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활동가로 지위를 확보하여 홍주지역에서의 지배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홍주(洪州)라는 지명 또는 이름이 왕건의 재위기간과 맞물려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추론의 가능성이다. 태조 왕건과 홍주의 호족 홍규(洪規)와의 관계, 홍규(洪規)의 딸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가 태조 왕건의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 등이 태조의 재임기간에 이뤄진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태조(太祖, 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 ~ 943년 7월 4일 (음력 5월 29일)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송악의 호족 왕륭(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장수가 되었다.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 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 홍유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태조 왕건은 918년부터 943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홍주(洪州)라는 이름이 탄생됐다는 점에 대한 여러 경우의 추론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홍주의 호족 홍규(洪規)에게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성(性)을 하사해 시조(始祖)가 됐으며, 홍규(洪規)의 딸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가 태조 왕건의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 등이 태조 왕건은 918년부터 943년까지 재위하는 기간 동안에 이뤄졌다는 점에서다. 따라서 지방제도의 개편이나 행정지명의 변화나 개편에 따른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를 떠나서 ‘홍주(洪州)라는 이름의 탄생이나 자연발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918년부터 943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추론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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